[다산 칼럼] 바이러스 너머, 한국은 계획을 갖고 있나?

입력 2020-02-23 16:53
수정 2020-02-24 12:59
침묵의 겨울이 계속되고 있다. 이번 겨울 들어 처음 눈 같은 눈이 내려 세상이 은빛 설국으로 변한 다음 날, 지인들과 점심을 했다. 종업원들이 쓴 흰색 마스크는 창밖 너머 흰 눈 세상과 묘한 조화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바이러스 이야기가 시작됐다. 최근 유럽 전시회에 다녀온 한 회장님의 체험담이 돌았다. 매년 열리는 행사여서 찜찜했는데도 갔는데, 평소 참석자의 10분의 1도 오지 않은 썰렁한 분위기였다고 했다.

중국 우한발(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공포가 모든 것을 뒤덮고 있다. 매년 2월 대한민국 모든 경제학자의 축제인 ‘경제학 공동학술대회’는 무기한 연기됐다. 대학들은 졸업식·입학식 행사를 취소하고 개강도 연기했다. 매년 2월 말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통신기술전시회인 MWC도 취소됐다.

코로나19 공포는 진원지 중국의 심장부도 강타하고 있다. 중국의 최대 정치 행사인 양회(전국인민대표회의, 인민정치협상회의)가 연기됐다. 매년 3월 개최되는 양회가 연기된 것은 1978년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선회한 이후 42년 만이다. 아시아의 다보스포럼으로 발돋움해 온 보아오포럼도 같은 운명에 처했다.

‘코로나19는 중국이 한국에 주는 세 번째 기회’라는 주장을 누군가 했다. 폐쇄적인 고립정책으로 스스로를 세계와 단절하면서 막 경제 발전을 시작한 한국과 경쟁하지 않았던 중국, 개혁·개방으로 선회한 뒤에는 한국에 경제협력 기회를 제공해 온 중국이지만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초대형 공포로 키운 중국 통제체제의 민낯은 한국에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작년 12월 말, 우한에서 심상찮은 바이러스 출현을 처음 공개한 의사 리원량의 경고는 무시되고 은폐됐다. 중국 공안당국은 괴담을 유포해 사회 불안을 야기한다고 그를 체포하고 입을 다물게 했다. 중국 당국이 ‘쉬쉬’하는 사이 한 달이라는 골든타임이 그냥 흘러갔다. 그 새 춘제(설) 연휴와 맞물려 이미 500만 명이 우한을 빠져나갔다. 현장 전문가의 의견이 정치적 편의 속에 무시되고 억눌린 동안 사태는 방치돼 커져만 갔다.

예기치 못한 위기가 발생할 때 국가의 선택은 그 사회의 가치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코로나19 사태는 개인의 안전·생명보다 당의 권위와 체제 안정을 우선으로 하는 ‘체제가 키워 온 리스크’가 터진 것이다. 정치적 논리가 전문가 집단의 현장성과 전문성을 압도하고, 자유 언론은 사회 불안을 키우는 유언비어의 온상으로 치부되고 통제되는 체제의 위험성을 세계가 목도하고 있다.

코로나19는 언젠가는 퇴치되겠지만, 중국이 입은 치명상은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40년간 양적 팽창으로 하드웨어를 최첨단으로 장착했지만, 소프트웨어는 고답적인 중세에 머물고 있는 ‘신뢰할 수 없는 나라’ 중국. 근육질만 키운 권위주의 통제체제의 본질을 제대로 봐야만 바이러스를 넘어 미래를 열 수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계획을 갖고 있는가? 자유와 정의의 상징인 촛불의 정신을 승계했다고 자임하는 문재인 정부는 전문가 집단의 현장성과 전문성을 얼마나 제대로 듣고 있는가. 친환경 정책을 원전 폐기와 동일시하면서 탈(脫)원전을 마구잡이로 밀어붙이면서 세계를 상대로 원전 수출을 하려는 한국 정부를 세계는 신뢰할 수 있을까. 경제 현장의 아우성은 기득권의 엄살쯤으로 치부하면서 전광석화처럼 진행한 최저임금 인상과 주 52시간제…. 전문가는 사라지고, 정치 논리가 압도하고, 현장의 급박함과 정권에 불편한 통계들은 가짜뉴스로 매도된다. 경제는 더 망가지고, 정치는 더 분열되고 있다.

집권 첫해 중국 베이징대 학생들 앞에서 “중국과 한국은 운명공동체”라고 외치던 대통령은 이제 “중국의 어려움은 우리의 어려움”이라고 한다. 이웃 국가를 배려하는 그저 듣기 좋은 이야기를 뛰어넘어 정말로 한국의 가치가 중국의 그것과 같아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금의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고 멋지게 만든 그 가치는 어디에 있는지, 이런저런 생각에 심사가 복잡해질 때쯤 점심은 끝났다.

창밖에 내리던 눈은 폭설로 변했다. 창밖의 서울은 눈 속에 완전히 파묻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