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에 이어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하며 4관왕에 오른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한국 영화의 위상을 드높인 것뿐만 아니라 ‘한 편의 영화를 넘어선 영화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됐다. 작품상 시상자로 나온 미국 대표 배우 제인 폰다의 입에서 ‘패러사이트(Parasite)’가 호명된 순간, 세계는 열광했다. ‘기생충’ 열풍이 불고 있는 해외나 각 분야에서 영화 한 편이 불러온 파급 효과는 대단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소품, 음식, 영화 촬영지까지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기생충’은 모두가 백수여서 살길이 막막한 기택 가족과 글로벌 정보기술(IT)기업 최고경영자(CEO)인 박 사장 가족이 서로 기묘하게 얽히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건 속으로 빠져드는 이야기다. 영화는 부자와 가난한 자, 극과 극으로 대비되는 두 가족이 결코 공생하며 살 수 없는 부조리한 현실을 비판한다. 독특한 스토리에 스릴러가 가미된 탄탄한 구성으로 아카데미 수상 이후 세계에서 가장 핫한 영화가 된 ‘기생충’ 속 배경지를 따라가 본다.
‘기생충’ 촬영 성지가 된 피자시대(스카이피자)
서울 동작구에 있는 스카이피자는 ‘기생충’에서 피자시대라는 이름으로 나와 기택 가족이 피자 상자 접기 아르바이트를 한 곳이다. 가파른 언덕 오르막길을 한참 걸어가야 만날 수 있는 작은 피자 가게는 국내는 물론 해외 관광객에게 카메라 세례를 받는 영화 촬영 성지로 관광명소가 됐다. 2002년 시작해 올해로 17년째를 맞은 동네 토박이 피자집은 가족이 함께 운영하고 있다. 영화에서 온 가족이 피자 상자를 접는 장면이 나오는데, 피자 상자 접는 방법은 실제로 이곳 사장님이 전수했다고 한다. 매장에는 촬영 당시 사용한 피자 종이 상자가 그대로 진열돼 있고 봉준호 감독 사인도 걸려 있다.
가게 밖에는 거장이 된 봉 감독과 피자집 사장이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어 영화 촬영 장소임을 인증하고 있다. 이곳의 대표 메뉴는 프라이드 치킨과 자연산 치즈로 만든 리치골드 고구마 피자, 직접 개발한 양념으로 맛을 낸 매콤달콤한 닭강정이다. 조용하던 동네 가게는 명소가 돼 매출이 크게 늘고 가게 앞은 세계적인 작품 ‘기생충’을 응원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서민의 삶이 그려진 아현동 슈퍼(돼지슈퍼)
기택의 장남 기우에게 명문대생 친구가 교환학생으로 떠나면서 자신이 과외하던 박 사장의 딸을 소개한다. 기택의 동네에 있는 우리슈퍼(돼지슈퍼)는 기우가 친구에게 과외를 제안받으며 슈퍼 앞 파라솔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던 장소다. 여동생 기정이 박 사장네 가사도우미를 쫓아내기 위해 복숭아를 훔치는 장소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우리슈퍼로 나왔지만 실제는 돼지슈퍼로 운영 중이다. 파라솔은 없어지고 아이스크림 냉동고가 놓여 있다. 가게에선 어린 시절 즐겨 먹던 과자를 팔고 있어 또 다른 추억거리를 선사한다.
슈퍼 바로 옆 골목으로 들어서면 박 사장 가족이 캠핑을 떠난 사이 저택을 제집처럼 차지하고 즐기다가 박 사장 가족이 뜻밖에 귀가하자 도망 나와 집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계단이다. 기우가 물에 잠긴 집에서 빠져나와 골목 계단에 서서 생각에 잠기는 곳이기도 하다. 촘촘한 계단이 있는 좁은 골목은 변화가 빠른 서울에서 여전히 옛 정취를 담고 있다.
박 사장 등 부유층이 살고 있는 곳 성북동
기우가 과외 면접을 위해 고급 주택가로 올라가는 길은 성북동에서 촬영됐다.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로 나와 문화예술의 향기가 가득한 성북동을 걷다 보면 언덕길 담장 높은 주택가에서 영화 속 장면을 만난다.
기우는 박 사장 집 과외선생으로 먼저 저택에 입성하고 여동생 기정은 박 사장 막내아들의 미술선생으로 들어간다. 아버지 기택은 박 사장의 운전기사로, 어머니 충숙은 가사도우미로 가족 모두가 차례차례 부자의 삶 속에 기생한다. 박 사장의 부인이자 안주인인 연교가 강조했던 믿을 만한 사람이 소개해 주는 형태의 ‘믿음의 벨트’에 따라 기택 가족 모두가 박 사장 집에 취업했고 이것은 치명적인 덫이 된다.
아카데미 미술상 후보에 오를 만큼 디테일하게 그려진 기택 가족의 반지하와 박 사장 저택은 경기 고양시 덕양구와 전북 전주에 있는 세트장이지만 그 풍경 속에서 빈부 격차의 현실이 생생하게 대비된다.
폭우 속에 집으로 향하는 자하문 터널 계단
폭우가 쏟아져 캠핑을 취소하고 돌아온 박 사장 가족을 피해 기택 가족이 도망 나와 가파른 계단을 달려가던 장소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 자하문 터널 입구 계단이다. 거센 폭우를 맞으며 기택 가족이 뛰어내려간 계단을 통해 봉 감독이 말하는 계층의 차이가 여실히 드러난다.
높은 언덕에 있는 부자 동네에서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며 반지하 집을 향해 뛰던 기택 가족의 모습이 처연하게 그려진 자하문 터널 안은 영화 속 장면에서 씁쓸한 느낌을 준다. 자하문 터널 주변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별장 석파정, 서울미술관, 윤동주 문학관 같은 관광명소와 함께 둘러봐도 좋다.
기우가 언덕 위 부촌을 오르는 장면과 가난한 동네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 등 영화 속 곳곳의 풍경에서 빈부 격차와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계층의 사다리가 뼈아프게 드러난다. 영화 ‘기생충’을 통해 보이지 않는 계급, 불평등한 사회 구조 등 세계의 동시대적인 문제가 화두로 떠오르게 된 것은 영화 속 대사처럼 ‘계획이 다 있었던’ 것일까.
글·사진=이솔 여행작가 leesoltou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