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세계상품' 인삼, 18세기 동서양 교역 휩쓸었다

입력 2020-02-20 17:44
수정 2020-02-21 00:40

1784년 8월 23일 미국 상선 중국황후(Empress of China)호가 뉴욕항을 출발했다. 긴 항해 끝에 닻을 내린 곳은 중국 광둥항. 배에 실린 27만달러어치의 화물 가운데 24만달러어치가 북미산 인삼이었다. 중국황후호는 가져간 북미삼과 가죽, 모피를 다 팔고 녹차와 홍차 1만9065㎏, 목면 바지 2만 장과 엄청난 양의 도자기를 싣고 이듬해 뉴욕항으로 돌아왔다. 투자자들은 수입한 중국 물건을 팔아 1500%의 수익을 냈다.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한 미국은 자국 상선을 이용해 성사시킨 첫 해외 무역에서 대박을 냈다. 인삼은 미국의 최초, 최고 수출품이었던 것이다. 당시 중국인들은 독립국가 미국의 국민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서 ‘새로운 사람들(new people)’이라고 했다. 배에 꽂힌 성조기는 ‘화기(花旗)’라고 불렀다. 깃발의 별들이 꽃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북미산 인삼이 화기삼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도 이때였다.

《인삼의 세계사》는 한국과 중국, 일본 등의 자료는 물론 각종 서양 문헌 속 인삼 관련 자료를 찾아내 세계사적 시각으로 복원한 인삼의 역사다. 저자인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의학 논고부터 약전, 동인도회사 보고서, 식물학 책, 지리지, 여행기, 박물지, 신문 기사, 서신, 소설과 시, 광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료를 뒤져 인삼의 흔적을 찾아냈다. 국내 인삼밭과 가공 과정은 물론 미국 최대 인삼밭과 제조공장을 견학하고 미국 인삼 농부와 심마니도 만났다. 그 결과 복원해낸 인삼의 세계사는 인삼의 역사이자 문화사이며 경제사다.

유럽에 처음 소개된 인삼은 한국산 고려인삼이었다. 일본 히라도에 주재하던 영국 동인도회사 상관원 리처드 콕스가 1617년 죽어가는 사람도 살리는 귀한 약이라며 런던 본사에 고려인삼이 든 꾸러미를 보냈다.

이후 ‘만병통치약’ 인삼의 명성을 유럽에 전파한 것은 예수회였다. 17세기 중반까지 포르투갈과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중국과 인삼에 대한 정보가 유럽에 확산됐다. 특히 1716년 예수회 신부 라피토가 캐나다에서 북미 최초로 인삼을 발견한 이후 동양에서 유럽으로 향했던 인삼의 무역항로는 반전됐다. 차와 커피 수입이 크게 늘어났지만 중국에 팔 상품이 없었던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은 북미삼을 인삼 수요가 많은 중국으로 실어날랐다. 북미 동부 항구에서 대서양 연안 항구를 거쳐 광둥으로 머나먼 길을 돌아가야 했지만 18세기 중엽 캐나다의 인삼 무역은 최고 3000%의 이익을 냈을 정도로 수익성이 높았다. 북미삼 무역을 주도했던 영국의 비중은 미국이 독립 이후 중국과의 직교역에 나서면서 19세기에 급락했다.

인삼은 유럽에 전해진 이후 무역품으로서뿐만 아니라 다양한 효능을 지닌 약재로 주목받았다. 그런데 18세기 후반부터 서양 의학계는 돌연 인삼의 약성을 폄하하고 약전에서 퇴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화학식과 유효성분 위주의 근대식 의약학을 정립하던 서양 의학계가 인삼에서 유효성분을 추출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문화적 요인도 컸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서양은 인삼을 동양의 전유물로 규정하고 인삼에 사치·방탕·전제성·비합리성 등의 부정적인 요소를 덧씌웠다. 북미삼의 막대한 생산 및 수출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중국의 인삼 가공기술을 따라잡지 못했고, 내다 팔기에 급급한 나머지 내수화에도 실패했다. 진세노사이드라는 유효성분이 분명히 규명된 오늘날, 여러 서양 국가가 인삼을 재배하고 수출하지만 인삼은 여전히 ‘열등하고 비합리적인 동양성’에 갇혀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동아시아가 구심점인 세계 상품 인삼의 경제체제와 이를 부정하려는 서구중심주의의 충돌과 부조화로 인해 서구 역사학은 인삼의 존재를 은폐했다는 얘기다.

이 책에서 눈여겨볼 대목이 또 하나 있다. 1970년대 말까지도 세계 인삼시장의 중심지 홍콩에서 점유율 1위를 자랑하던 고려인삼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2017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한국 인삼의 홍콩 시장 점유율은 6%에 불과하다. 캐나다산 인삼(72%)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다.

세계 곳곳에서 인삼이 재배되면서 인삼의 국적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도 위협적이다. 미국 러시아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프랑스 에스파냐 덴마크 벨기에 등과 호주 뉴질랜드 칠레 등 남반구에서도 고려인삼이 재배되고 있다. 중국이 추진 중인 ‘길림인삼산업진흥공정’은 한국의 인삼산업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저자는 매년 수백t씩 불법 유출된 고려인삼의 우수한 종자가 향하는 곳은 중국 동북부만이 아니라며 경각심을 촉구한다. 고려인삼의 미래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