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있는 사외이사 모십니다"…올 주총 앞두고 검찰·국세청 등 권력기관 출신 몸값 '高高'

입력 2020-02-18 17:31
수정 2020-02-19 01:01
올해 정기 주주총회를 앞두고 검찰 국세청 등 이른바 ‘힘센 기관’ 출신 ‘OB(올드보이)’를 사외이사·감사로 모시기 위한 상장사들의 경쟁이 치열하다. 법무부가 사외이사 임기를 6년으로 제한하는 상법 시행령 개정안을 올해부터 강행하기로 하면서 사외이사 교체를 둘러싸고 ‘큰 장’이 선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에 따르면 올해 정기주총에서 6년 임기제한으로 새로 선임해야 하는 사외이사는 718명에 달한다. 신규 사외이사 수요가 급증하자 권력기관과 연줄이 있는 전관들의 몸값이 치솟고 있다는 분석이다. 일각에선 정권 차원의 낙하산 인사가 속속 나올 것이란 전망도 내놓는다.


“힘센 권력기관 출신 전관 어디 없나요”

한국경제신문이 18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공시된 각 상장사의 정기 주주총회 안건을 전수조사한 결과, 이날까지 123개사가 사외이사 및 감사 후보자 총 207명의 세부 경력을 공시했다. 후보들의 경력을 보면 정부나 감독기관 등 권력기관 출신 비중이 전체의 23.7%(49명)에 달했다. 사외이사·감사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산업계(29.9%, 62명)에 육박하는 규모다.

구리 제조업체 풍산은 사외이사로 황희철 전 법무부 차관을, 사외이사 겸 감사위원으로 김덕중 전 국세청장을 선임했다. 부산 지역방송국 KNN은 홍광식 법무법인 국제 변호사를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홍 변호사는 부산지방법원 부장판사 출신이다. 한온시스템은 김도언 전 검찰총장을 이번 정기 주주총회에서 사외이사로 재선임할 예정이다. 김 전 총장은 한온시스템이 사모펀드 한앤컴퍼니에 인수된 2015년부터 사외이사직을 맡고 있다.

국세청과 검찰 출신들은 감사 자리에도 인기다. 대상홀딩스는 광주지방국세청장을 지낸 임창규 김앤장 법률사무소 고문을, 만도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 출신인 김경수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를 사외이사 겸 감사로 선임했다. 녹십자엠에스는 제주세무서장을 지낸 황상순 민우세무법인 대표세무사를 비상근감사로 선임했다. 유가증권시장 상장사 대현은 조정환 전 수원지방검찰청 부장검사를 사외이사 겸 감사로 신규 선임했다.

주주총회 시즌이 다가올수록 권력기관 출신 사외이사·감사 비중은 더욱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한 상장사 IR담당자는 “법무부 시행령에 맞춰 사외이사를 교체해야 하는데 섭외에 난항을 겪고 있어 주주총회소집 공시를 내지 못하고 있다”며 “무게감 있는 전관인사들을 대형 기업들이 쓸어가고 있다”고 전했다.

경영 감시보단 로비스트로 활약

기업의 사외이사와 감사 자리에 권력기관 출신들이 대거 선임되면서 이들이 경영진을 감시하고 견제하기보다는 권력기관을 상대로 한 ‘로비스트’로 기능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안상희 대신지배구조연구소 본부장은 “결과적으로 경영 투명성을 떨어뜨리는 부작용을 낳을 소지가 있다”고 했다.

국민연금을 비롯한 기관투자가들이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가의 수탁자 책임원칙)를 내세워 비전문가의 사외이사행에 반대하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국민연금은 최근 상장사 태림포장의 임시 주주총회에서 해당 업종과 무관한 사외이사의 신규 선임에 반대표를 던졌다. 이래저래 상장사로선 주주 관리 부담이 커진 셈이다.

3월 정기주총을 앞둔 대기업과 상장 공기업들의 사외이사·감사 선임이 본격화되면 정권 차원의 낙하산 인사가 속속 나타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올해 상당수 대기업에서 사외이사 물갈이가 예고되면서 4월 국회의원 총선거 예비경선에서 탈락한 여권 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챙겨주기식 인사’가 예상된다”며 “벌써부터 어느 기업 사외이사와 감사 자리에 누가 온다더라는 식의 소문이 무성하다”고 말했다.

상장회사협의회에 따르면 사외이사 6년 임기제한에 따라 올해 정기주총에서 사외이사를 새로 뽑아야 하는 상장사는 556곳에 달한다. 이 가운데 29곳(5.2%)은 세 명 이상 사외이사를 물갈이해야 하며, 두 명 이상을 바꿔야 하는 상장사도 116곳인 것으로 집계됐다. 셀트리온은 사외이사 여섯 명 전원이 교체 대상이다. 삼성 계열사 중에선 삼성SDI와 삼성SDS가 사외이사 네 명 전원을 바꿔야 한다. 삼성전기는 사외이사 네 명 중 세 명이 교체 대상이다. 일양약품, 네오위즈, 안랩, 헬릭스미스 등도 사외이사 전원이 물갈이 대상에 올랐다.

전범진 기자 forwar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