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인사이트] 제철 만난 의결권 대행사…"주주 모으려면 몇억 내셔야"

입력 2020-02-13 17:26
수정 2020-02-14 01:30
▶마켓인사이트 2월 13일 오후 4시12분

“부르는 게 값입니다. 급한 대로 착수금을 주고 가계약부터 했습니다.”(코스닥 상장 A사 대표)

정기 주주총회 시즌을 앞두고 의결권 위임 권유 대행업체들이 특수를 누리고 있다. 의결정족수 부족으로 안건이 부결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상장사들이 앞다퉈 의결권 위임 대행업체를 찾고 있어서다. 인력이 많고 업력이 있는 일부 대행업체는 기업을 골라 받는 진풍경까지 벌어지고 있다.<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margin:25px 0; border:1px solid #c3c3c3" />우후죽순 생겨나는 의결권 위임 대행사

의결권 위임 대행사는 주주명부에 있는 주주 이름과 주소만으로 소액주주를 찾아가 의결권을 모아오는 일을 한다. 신고·허가업이 아니기 때문에 공식 통계는 없지만 40여 개 업체가 영업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 리치온, 지오파트너스, 로코모티브, 보다네트웍스, 미래앤케이, 씨씨케이 등이 대표적이다.

2018년 10개 업체가 설립된 데 이어 지난해에도 20개 가까운 크고작은 의결권 위임 대행업체가 생겼다. 주요 고객은 코스닥시장 상장사들이다. 유가증권시장 상장사에 비해 소액주주 비중이 높아 의결정족수 확보가 어렵기 때문이다.

비용은 천차만별이다. 상장사의 총발행주식 수와 소액주주 지분율, 매출, 안건의 중요도 등에 따라 달라진다. 적게는 몇백만원에서 많게는 2억~3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계약금을 미리 내고 정기 주총에서 안건이 통과되면 인센티브를 주는 구조가 많다.

코스닥협회가 634개 상장사를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 결과 지난해 정기 주총 기간에 의결권 위임 대행업체에 지불한 비용은 평균 5546만원으로 나타났다. 전년 4393만원에 비해 26% 뛰었다. 올해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의결권 위임 대행업체들은 견적 비용을 근거로 올해 평균 7500만원을 예상하고 있다. 이태성 로코모티브 대표는 “지난해 이후 상장사들의 문의가 크게 늘었다”며 “임직원들이 직접 발로 뛰다가 한계를 느낀 상장사들이 비용을 감수하고 찾아온다”고 했다.


감사 선임이 최대 관건

이런 현상이 나타난 건 섀도보팅이 폐지되면서다. 섀도보팅은 의결정족수를 충족하기 위해 주주가 주총에 참석하지 않아도 투표한 것으로 간주해 다른 주주의 투표 비율을 의안 결의에 적용하는 제도다. 1991년 도입됐다가 2017년 12월에 폐지됐다. 대주주의 의결정족수 확보 수단으로 남용된다는 지적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상법에서 규정한 주총 보통결의 기준은 ‘출석 주주 50% 이상 찬성+전체 주주 25% 이상 찬성’이다. 재무제표 승인 등 간단한 안건을 통과시키려고 해도 전체 주주의 4분의 1이 넘는 찬성표를 받아야 한다. 최대주주 측 지분율이 높지 않은 상장사는 25% 이상 찬성표를 받는 게 쉽지 않다. 주식을 사고파는 ‘손 바뀜’이 잦은 코스닥 상장사는 더욱 그렇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에 따르면 정기 주총에서 1개 이상 안건이 부결된 상장사는 섀도보팅 폐지 직후인 2018년 76곳에서 지난해 188곳으로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가장 문제가 되는 안건은 감사 및 감사위원회 위원 선임이다. 지난해 부결된 주총 안건 238건 중 감사 선임이 전체의 62.6%(149건)를 차지했다. 감사 선임 안건에는 최대주주 및 특수관계인의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이른바 ‘3% 룰’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나머지 의결정족수를 소액주주들로 채워야 한다는 의미다.

올 정기 주총에서 신규 감사를 선임해야 하는 코스닥 상장사는 전체의 41.9%인 544곳이다. 코스닥 상장사 열 곳 중 네 곳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지난해 정기 주총에서도 490개 코스닥 상장사가 감사 선임 안건을 올렸지만 125곳이 선임에 실패했다. 제조업을 하는 한 코스닥 상장사 IR팀장은 “이달 들어 서울과 부산을 비롯해 전국 각지를 돌며 의결권을 많이 갖고 있는 소액주주들을 찾아다니고 있다”며 “매년 2~3월은 소액주주들에게 매달리느라 본업을 못 할 정도”라고 말했다.

해마다 ‘주총 비용’이 불어나면서 상장사들의 불만도 쏟아지고 있다. 한 상장사 임원은 “정상적인 경영 활동에만 매진해도 모자랄 판에 주총에 너무 많은 비용과 에너지를 쏟아야 해 답답한 노릇”이라고 했다.

도움 안 되는 전자투표

의결권 위임 대행업이 제도권 밖에서 운영되다 보니 각종 부작용도 나타난다. 비용이 들쭉날쭉할 뿐 아니라 신생 업체들이 계약금만 받고 제대로 의결권 위임 대행 업무를 하지 않는 사례도 있다.

소액주주의 참여율을 높이기 위해 전자투표제가 도입됐지만 행사율은 저조하다. 지난해 정기 주총 때 전자투표 시스템을 이용한 상장사는 총 667곳이었다. 이달 들어 삼성, 현대자동차 등 주요 대기업이 전자투표제를 도입했다. 올해 정기 주총에서는 800여 개 기업이 활용할 전망이다.

하지만 지난해 정기 주총 때 기업별 전자투표 행사율은 평균 4~5% 수준이었다. 증권사 관계자는 “코스닥 업체는 통상 전체의 60~70%가 소액주주라는 점을 감안하면 전자투표 행사율이 15% 이상 나와야 안건을 통과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은정 기자 ke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