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상·하원 합동회의장 국정연설에서 105번이나 박수를 받았다. 60분 연설이었으니 거의 30초마다 박수가 터져나온 것이다. 민주당과 공화당이 대립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건강보험 개혁인 ‘오바마 케어’와 증세를 두고 대립했다. 그럼에도 공화·민주 상원의원들은 자리를 섞어 앉아 연설을 들었다. 국가 지도자에 대한 예우이고, 미국 정당정치의 초당파적 모습이었다.
올해는 달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국정연설에서 업적 홍보로 80분을 썼다. 연설이 끝났을 땐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연설문 찢기 퍼포먼스를 네 차례에 걸쳐 감행했다. 펠로시가 악수를 위해 내민 손을 무시해버린 트럼프의 신사답지 못한 비례(非禮)를 비례로 응수한 것이다. 국정연설이 국정 아젠다 제시가 아니라 재선을 위한 출정식으로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본질적인 이유는 트럼프 등장 이후 깊어진 공화당과 민주당의 당파적 대립에 있다. 미국 정치의 장점으로 꼽혔던 초당적 화합은 사라지고 대통령의 신사도(紳士道)와 하원의장의 품위 모두를 잃게 한 당파성만 남았다.
정치 지도자들의 품위를 깎아내리는 당파적 행보를 생각할 때 우리 민주정치 모습은 더 초라하다. 지난해 12월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 야당 의원이 의사 진행의 편파성을 놓고 항의할 당시 문희상 국회의장은 귀를 틀어막는 행동을 했다. “국회가 살아 있을 때 민주주의도 살고 정치도 산다”고 강조했던 6선 의원이 불명예스럽게 정치 여정의 마지막을 끝맺음했다. 필리버스터란 본래 안건에 반대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충분히 반대할 토론권 행사다. 그런데 의장이 야당의 반대 토론 시간에 여당의 찬성 토론을 끼워넣어 논지를 물타기하고, 반대할 권리를 침해하는 편파적 의사 진행을 했다.
중립을 지키지 못하면 공정하지 않고, 공정하지 않으면 정의롭지 못하다. 정부의 4·15 총선 관리도 마찬가지다. 정부의 선거 중립과 관련해 지난 6일 문재인 대통령이 300여 명과 함께 마스크를 쓴 채 참석한 ‘부산형 일자리 상생협약식’은 초현실적이었다. 단체로 마스크를 쓴 기괴함 속에서 ‘총선용 행사’라는 속내가 읽혔다.
1960년 ‘3·15 부정선거’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4·19 혁명’으로 터져나왔고 ‘국정원 댓글 사건’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의 단초를 제공했다. 그렇지 않아도 ‘울산 시장선거’ 청와대 개입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는데 정부가 지금부터라도 공정한 선거를 위한 특단의 노력을 기울여야 함을 여권은 새겨야 한다. 정부의 선거 중립과 공정한 관리가 훗날 정권을 평가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으므로 남다른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특히 여당 당적을 가진 국무위원들이 총선 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모습은 선거 중립 측면에서 바르지 않다. 선거관리를 책임진 국무총리를 비롯해 행정안전부 장관, 법무부 장관 그리고 여당의 공약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국토교통부 장관과 교육부 장관이 여당 국회의원이므로 공정성 확보를 위해 민주당 국무위원들의 당적 탈퇴가 필요하다. 전례가 없어도 새롭게 선거 중립의 선례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총선이 6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선거는 정당이 국가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의 심판을 받는 절차다. 정파적 이익에만 매몰된 정책들과 과거로 회귀하는 행태에 대해 국민은 심판의 매를 들 것이다.
국민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공포에 떨고 있는데 여야는 앞에선 국민의 건강과 안전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뒤에 숨어 4·15 총선 유불리만 따지고 있는 모습이다. 자유한국당은 미래한국당과의 관계에 신중해야 한다. 더불어민주당 주도의 ‘1+4’ 정당연합이 만든 ‘협치의 종언’이 비례(比例) 미래한국당을 탄생시킨 것이기는 하지만 ‘꼼수 대응’ 이미지가 ‘정권심판론’이라는 대의를 훼손할 수 있다. 민주당 역시 ‘야당심판론’ 구호가 3년차 집권당으로서 당당하지 못하고 퇴보적인 문제 제기임을 인식해야 한다.
국민이 총선을 통해 일궈내고자 하는 선진 민주정치란 미래 비전과 초당적 국익을 제시하고, 자유 확대와 정의 실현을 위해 진력하는 정당의 모습이다. 정부의 공정하고 중립적인 선거관리가 뒷받침돼야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