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구석기인, 동굴에 그린 들소처럼 강해질 거라 믿었다

입력 2020-02-13 18:09
수정 2020-02-14 00:42

역사박물관에 가면 구석기실, 신석기실 등의 선사시대실에는 대개 오래 머물지 않는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똑같다. 돌로 만든 도구와 그릇 정도가 대부분인 데다 설명도 충분치 않아서 흥미를 느끼기가 쉽지 않다. 역사 수업에서 배운 시대별 특징을 떠올려봐도 유물 몇 점만 보고 나면 밑천이 동난다. 문자로 역사가 기록되지 않은 선사시대 사람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물건이며 벽화, 동굴화, 암각화, 조각 등을 만들었을까. 신앙과 사상은 어떻게 형성되고 확산, 변화했을까.

고분벽화와 암각화 연구의 권위자인 전호태 울산대 교수(반구대암각화유적보전연구소장)는 《고대에서 도착한 생각들》에서 이런 의문과 함께 구석기시대 선사인을 비롯해 삼국시대 고대인들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책의 목차는 온통 질문으로 구성돼 있다. ‘구석기시대 미술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농경은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생각을 어떻게 바꿨을까’ ‘사람과 신은 무엇이 같고 다를까’ ‘철기시대에 창세신화는 왜 밀려나게 됐을까’….

저자는 시대별로 중요한 국내외 유물과 유적을 비교하고, 동서양의 신화 미술 종교를 넘나들며 선사인과 고대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문자기록의 부족함을 상상으로 메운다. 아버지와 아들을 비롯한 여러 인물의 대화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 점도 흥미롭다. 다음은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왜 남신이 아니라 여신을 먼저 형상화하고 숭배했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선사시대, 특히 신석기시대까지의 신상(神像)은 90% 이상이 여신(女神)이야. 동서양 어느 곳의 신화를 봐도 사람에게 아이를 주는 이는 여신으로 나와. 여신은 사람을 처음으로 낳기도 했지. 생명을 준 거야.(중략) 여신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대지를 적시는 비가 된다는 이야기도 있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구석기-신석기-청동기-(초기)철기시대로 이어지는 선사시대를 다룬 부분, 후기철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를 다룬 부분, 샤머니즘부터 음양오행론 불교 신선신앙과 도교 유교 고분벽화에 담긴 예술과 신상 등을 섭렵한 부분 등이다. 저자는 때로 해설자로, 때로는 그 시대의 인물이 돼 당대 상황을 상상하고 설명한다. 풍부한 자료, 합리적 유추와 상상력이 이 책의 최대 장점이다.

구석기인들은 왜 동굴벽에 들소나 말, 곰, 새 등을 그렸을까. 아무런 도구가 없던 시절, 사람보다 강하고 빠른 존재였던 이들 동물을 그림으로써 신이 이들의 능력을 인간에 덧입혀 줄 것이라고 생각했을 거라고 저자는 상상한다. 초보적 단계에 머물렀던 구석기인들의 신은 신석기시대에 가서 크게 달라진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이전과 매우 달랐다. 처음으로 집을 지었고, 밭을 갈아 곡식을 심었으며, 짐승을 길들여 함께 지내거나 부렸다. 그릇의 발명도 빼놓을 수 없다. 저자는 토기 제작, 타제석기에서 마제석기로의 발전, 농경의 시작 등이 보여주듯이 원래 자연에 없던 것을 인간이 만들면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있다고 믿는 존재, 즉 ‘신’을 발견했다고 설명한다. 그 결과 신전과 신상을 제작해 숭배의 제의를 수행하고 세계의 근원을 탐구하며 신화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사후세계와 내세의 개념이 등장하고 절대적 존재와 직접 소통하는 제사장 개념이 형성된 것도 이때다.

청동기시대에는 부족국가가 형성되고 계급사회가 되면서 현실의 권력관계가 중요해진다. 특히 제정일치 사회에서 청동거울과 청동방울 등은 신의 권위를 상징하고 신과 소통하는 매개체였다. 이 때문에 왕과 제사장이 각각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을 나눠 가진 뒤에도 청동기 제작의 중요한 비밀은 왕만이 알고 알았을 것이라고 저자는 추정한다.

철기시대에는 청동기시대에 형성된 지배 및 피지배 관계가 보편화됐다. 철기는 청동기보다 재료를 구하기가 쉬워 대량으로 생산됐다. 전쟁의 규모가 커졌고 국가는 거대해졌다. 쇠로 제작한 농기구와 무기를 쥔 인간은 더 이상 자연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부족의 창세신화가 뒷전으로 밀려나고 시조의 영웅신화와 건국신화가 형성된 배경이다. 저자는 영웅과 하늘이 신성시되고, 동명왕 신화와 가야 건국신화가 여러 갈래로 전해지는 이유 등을 이런 관점에서 풀어낸다.

저자의 전공 분야인 암각화와 벽화에 대한 설명도 흥미롭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이 대표적이다. 저자는 사냥 대상인 짐승은 물론 고래를 비롯한 어류 등이 촘촘히 새겨진 암각화를 선사인들의 ‘바위신앙’으로 설명한다. 특정한 바위 자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고 신성시했다는 것. 저자는 “암각화는 바위를 캔버스로 삼는 행위예술의 결과”라며 “예술도 시작은 주술”이라고 덧붙인다.

샤먼과 음양오행론, 불교, 도교, 신선사상, 유교 등의 유입과 그에 따른 변화를 다룬 후반부도 읽을 만하지만 압권은 역시 전반부다.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석기 한 점, 벽화 한 점을 통해 고대인과 대화하고 상상하는 저자 덕분에 선사시대를 여행하는 기분이다. 저자가 한쪽 눈의 시력을 잃고 문사철의 벗이던 부인마저 천국으로 떠나보내는 시련 가운데 써낸 노작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