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훈 칼럼] 왜 보수는 불안한 소수가 되었나

입력 2020-02-11 18:25
수정 2020-02-12 00:31
일각에서 윤석열 검찰총장을 보수의 대안으로 거론하는 것은 보수의 비극이다. ‘적의 적은 동지’라는 유치한 논법과 다를 것이 없다. 윤 총장의 정치적 성향이 어떻든 반(反)문재인이면 된다는 것인가. 사정이 아무리 다급하고 절박해도 이럴 수는 없다. 보수는 내세울 인물이 없어 고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보수의 위기는 정체성의 위기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구성원리로 삼고 있다. 헌법이 바뀌기 전까지는 이것이 대한민국의 최우선적 이념이고 나머지는 대안적·보완적인 것일 뿐이다. 그런데 자칭 보수라는 사람들조차 헌법이 표방하고 있는 이념적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

보수진영의 정치적 지리멸렬은 두 전직 대통령이 시민들의 신뢰를 잃고 영어(囹圄)의 신세로 전락한 데서 비롯됐다. 한때 국민의 높은 지지를 받았고 혁명이나 전쟁이 발발한 것이 아닌데도 이런 비극이 생긴 것은 지도자로서 도덕적 권위를 일거에 상실한 탓이 크다. 실체적 진실과 별개로 한 사람은 돈 문제, 또 한 사람은 군주적 리더십에 대한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의 가혹한 정치보복과 일방적 적폐청산의 빌미도 이 지점에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엄밀하게 보면 실패의 주체는 보수 진영을 이끌던 지도자였지, 보수가 추구한 이념과 체제가 아니었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비해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세계적으로 증명한 국가다. 전직 대통령들이 법적 도덕적으로 무너졌다는 사실만으로 이념의 정당성이 훼손될 수는 없다. 많은 국민이 국제사회의 만류를 뿌리치고 북한 정권을 도우려는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는 이유는 북핵 폐기라는 목표에 어긋나기 때문이지, 평화가 싫기 때문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보수의 이념적 깃발이 흔들리니 그 아래 모인 사람들도 덩달아 어지럽게 흩어질 수밖에 없다. 보수 야당의 낮은 지지율을 보수적 가치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 철회로 쉽게 치환해버리고 만다. 깃발은 쳐다보지 않고 사람만 열심히 찾고 있다. “사람은 언제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는 좌파 진영의 깃발과 완벽하게 대비되는 장면이다.

선거가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깃발부터 제대로 세워야 한다. 어차피 한국의 선거는 예나 지금이나 지역선거다. 대구·경북이 보수적이고 호남은 진보적이라서 특정 정당에 몰표가 쏟아지는 것이 아니다. 한때의 득표를 위해 이념적 지향에 섣불리 손을 대선 안 된다. 이명박 정부가 ‘이념을 넘어선 실용’을 내건 것이나 박근혜 정부가 경제민주화를 내세운 것은 정치공학으로는 유효했을지 몰라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흔드는 좌파 진영에 운신의 공간을 넓혀주는 실수로 이어졌다.

이런 관점에서 안철수의 중도도 허망한 것이다. 좌든, 우든, 이념은 사회문제를 진단하고 처방을 제시하는 데 자기 완결성을 갖고 있어 양쪽을 절충하는 이념이라는 것은 없다. 당연히 깃발도 없다. 호남이 지지를 철회하자 정치적 입지가 사라진 이유다.

무너진 보수의 깃발이 저절로 세워질 리는 없다. 원인이 도덕성의 실추에 있다면 윤리적 대오각성과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는 용기가 필요하다. 어떤 이념이나 체제는 그것을 지키려는 사람들에 의해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현재 자유한국당과 새보수당에서 출마를 서두르는 현역 의원들의 면면은 보수의 이념적 가치를 호소력 있게 대변하지 못한다. “보수가 살려면 기득권부터 버려야 한다”는 진중권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국회의원으로서 권력과 명예를 누린 사람들은 그 지위에 걸맞은 양심과 책임감을 보여야 한다. 보다 도덕적이고, 보다 헌신적인 이들에게 기회를 양보해야 한다. 보수가 도덕적 재건을 시작하면 현재 진보진영이 직면하고 있는 또 다른 도덕적 위기와 비교 및 재평가가 이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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