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요 제조업의 불황으로 구조조정 바람이 본격화되자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이 대응 매뉴얼을 내놨다. 구조조정이 앞으로 전 산업계로 확산될 것이라는 우려가 노동계 내에 팽배해진 데 따른 것이다. 한국노총이 구조조정 대응 지침을 배포한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이후 11년 만이다.
구조조정 확산에 노동계 전전긍긍
9일 노동계에 따르면 한국노총은 지난달 중순 ‘구조조정 대응 매뉴얼’ 1000권을 제작해 전국 산하조직에 배포 중이다. 매뉴얼 제작에는 한국노총 산하 중앙법률원 변호사와 노무사 등 17명이 투입돼 1년간 기업별 사례를 조사하고 사측의 구조조정 단계별로 노조와 근로자의 대응 방침을 담았다. 한국노총은 매뉴얼 제작과 관련해 “어차피 구조조정이 이뤄져야 한다면 그 수단과 법률적 효과를 숙지하고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해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제작 배경을 밝혔다.
한국노총은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가 한창이던 2009년 3월에도 구조조정 대응 매뉴얼을 제작해 배포했다. 당시 한국노총은 “노·사·민·정 사회적 대타협에도 불구하고 개별 사업장에서는 구조조정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다”며 “일방적 구조조정을 저지하고 조합원들의 고용 안정을 지켜내기 위해 매뉴얼을 발간했다”고 했다.
제조업 불황 어떻길래…
노동계가 11년 만에 구조조정 매뉴얼을 내놓은 것은 산업현장의 감원 바람이 그만큼 심상치 않다는 판단 때문이다. 2015년 조선업 불황과 함께 대규모 감원이 이뤄진 이후 지난해부터는 디스플레이, 자동차, 금융, 항공, 보험업 등 산업 전반에 구조조정이 확산하고 있다. 특히 불황에 빠진 디스플레이업계는 심각하다. 지난해 9월 삼성디스플레이를 시작으로 10월에는 LG디스플레이가 수천 명의 희망퇴직을 받았고, 코닝정밀소재도 지난달부터 5년 이상 근무한 생산·사무직을 대상으로 퇴직 신청을 받고 있다.
기업 파산도 줄을 잇고 있다.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지난해 파산 신청 기업과 기업회생 신청 기업 수는 각각 931곳, 1003곳으로 통합도산법이 시행된 2006년 이후 사상 최대치를 나타냈다.
노동계는 제조업 불황이 장기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매뉴얼 제작 책임을 맡은 김형동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부원장(변호사)은 “최근 법원에 파산 신청이 급증하는 등 구조조정 양상은 다르지만 업종을 가리지 않고 산업현장의 감원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며 “구조조정 광풍 속에 근로자들이 ‘끓는 물 속 개구리’가 돼선 안 된다는 생각으로 구체적인 대응 지침을 마련한 것”이라고 말했다.
“임금 줄인다면 삭감보다 반납을”
한국노총은 150여 쪽 분량의 매뉴얼에서 기업의 인사노무전략을 6단계로 구분했다. 1단계는 근로시간 조정(근로시간 단축·연차휴가 사용·휴업·휴직 등)에서 2단계 임금 조정(임금 반납·삭감)과 인사이동(전직·전출·전적)으로 이어진다. 3단계로 가면 인원 감축에 따라 아웃소싱이나 희망퇴직이 이뤄지고 4단계가 기업 인수합병이다. 5단계는 경영상 이유에 의한 집단해고 절차인 정리해고가 진행되고 마지막 6단계는 회생절차(워크아웃·법정관리 파산)다.
임금 감소, 인사명령, 해고, 기업변동, 기업 도산에 대한 노조의 대응, 구제 방안 등 6개 장으로 구성된 매뉴얼은 장별로 근로자와 노조의 대응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가령 회사가 경영난을 이유로 임금을 줄이려고 하면 노조가 회사의 경영 사정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절차를 따를 것을 요구하라는 식이다. 또 임금을 줄이더라도 삭감보다는 반납을 선택해야 퇴직금 산정 때 유리하다는 설명도 있다.
적대적인 노사관계 관행의 단면을 보여주는 내용도 있다. 회사가 복리후생비를 줄이려고 할 경우 노조는 임원 수당부터 삭감할 것을 요구하고, 회사가 경영상해고 조치에 들어가면 사용자 측의 불법행위를 고발하는 식으로 맞서라고 했다.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