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6일 하노이는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농무(濃霧)에 휩싸였다. 큰 일교차로 생긴 자연적인 현상이건만, 짙은 안개는 마치 베트남이 처한 위기 상황을 암시하는 듯 했다. 중국발(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란 예측 불가능한 폭풍이 언제까지 지속될 지, 베트남 전역이 숨죽이고 있다.
가장 우려스러운 건 중국-베트남 간 공급망의 붕괴다. 베트남 정부가 지난 1일 중국과 베트남을 오가는 모든 비행기의 운항을 중단시키겠다고 발표하면서 항공 물류가 끊겼다. 철도 운송도 중단됐고, 중국과의 국경 무역도 사실상 금지됐다. 1월 말까지만해도 베트남 수출입국은 중국-베트남 육상 무역의 거점인 랑선(Lang Son)성에 있 핑샹 등 국경 관문을 2월8일까지 폐쇄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삼성전자, LG전자 등 베트남 대 주요 기업들이 중국산 원자재 수입의 긴급함을 호소하면서 랑선을 통한 국경 관문은 일부 개통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베트남한국상공인연합회(코참) 관계자는 6일 “5개의 관문 중 1곳이 5일부터 열렸다”며 “중국인 화물차 기사가 특정 지점까지만 이동하고, 운전자를 교체한 뒤 화물차에 대한 방역작업을 마친 후에야 들여보내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주베트남 한국대사관과 코참이 베트남 정부에 우리 기업들의 어려움을 강하게 호소한 덕분에 최소한의 물류길이 열린 셈이다.
랑선 국경 관문이 열리기까진 상당한 우여곡절이 있었다. 설 연휴 직후만해도 베트남 정부는 4, 5일 이틀 간 임시로 랑선 국경 관문을 모두 열기로 중국측과 합의했다. 장기간의 설 연휴로 인해 원자재, 부품 재고가 줄고 있는 데다 바이러스 사태가 언제까지 이어질 지 모른다는 판단에서다. 그러다 4일에 베트남 부수상이 랑선성을 방문, 코로나 바이러스 유입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발언하면서 분위기가 급변했다. 베트남측에서 국경 통제를 강화했고, 그러자 중국측도 베트남 정부의 강경 조치에 반발해 베트남 수출을 잠정 중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5개의 관문 중 한 곳만 문을 열 수 밖에 없던 사연이다.
현재 베트남 내 주요 한국 기업들은 향후 2주 정도가 큰 고비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전자만해도 편광필름 등 휴대폰 생산에 필요한 자재의 30% 가량을 중국에서 가져오고 있다. 랑선 국경 관문엔 삼성 박닌, 타이응우옌 공장으로 들어갈 컨테이너 박스가 120여 개가 대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랑선 관문이 일부 개통되긴 했지만 바이러스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삼성도 한 달 이상을 버티기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하이퐁에 있는 LG전자 등도 자재 및 부품 재고가 2~3주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LG전자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물건을 보낸 뒤, 한국에서 베트남 항공물류로 다시 가져오는 방법도 활용하고 있을 정도로 상황이 긴박하다”고 말했다. 닌빈성에서 조립공장을 운영 중인 현대자동차도 위험에 처했기는 마찬가지다.
베트남 정부가 자국 경제에 치명타가 될 수 있음에도 연일 대(對)중국 강경조치를 취하고 있는 데엔 정치적인 이유가 깔려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자칫 유화적인 제스쳐를 취했다가 전염병의 확산이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면, 베트남 정부의 리더십에도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미 베트남은 2014년에 대규모 반중 시위를 경험한 바 있다. 당시 중국이 남중국해 파라셀 제도 인근에 석유 시추 장치를 설치한다고 하자 5월 10일부터 2개월에 걸쳐 반중 여론이 들끓었다.
대외적으론 베트남 정부가 중국을 향해 할 말을 다 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번 바이러스 사태를 통해 베트남은 외국투자기업과 중국이라는 두 개의 기둥에 지나치게 의존해 왔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게 자명하다. 삼성 같은 외국기업이 흔들리면 베트남 경제는 치명타를 입을 수 밖에 없다. 베트남 전체 수출의 약 8할을 외국투자기업이 담당한다. 외국투자기업들은 베트남을 임가공 기지로 활용하면서, 필요한 원자재와 부품은 중국이나 한국에서 들여오고 있다. 베트남에 중국은 제1의 수입국이다. 수출이라는 측면에서도 베트남의 최대 수출품인 쌀을 가장 많이 사는 나라는 중국이다. 베트남은 지난해 총 414.1억달러 어치의 상품을 수출했는데, 이 가운데 약 20%가 농수산품이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베트남에선 부품 현지화라는 해묵은 과제가 다시 대두될 가능성이 높다. 삼성전자만해도 박닌성에 2008년부터 공장을 가동했다. 하지만 삼성에 부품을 공급하고 있는 베트남 현지업체는 일부 포장재 업체를 제외하곤 거의 없다. 자동차 부품 회사는 말할 것도 없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후폭풍은 비단 공급망 뿐만 아니라 베트남 전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1월 무역액은 1억달러 가량 적자를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6개월 연속 무역 흑자 기록이 2020년 첫 달에 깨진 셈이다. 2월은 최악의 달이 될 가능성이 높다. 소비 심리도 바닥을 모를 정도로 빠르게 추락하고 있다. 하노이 도심은 출,퇴근 시간을 제외하면 도로 정체가 없을 정도로 한산하다. 사람들이 외출을 자제하고, 칩거하면서 미용, 음식, 마사지 등 각종 서비스업들은 최악의 불황을 겪고 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조류독감까지 베트남 경제를 짓누르고 있다. 지난 1일 중국 후난성에서 조류독감 발병 사실이 발표되면서 인근 지역인 베트남도 경계 태세를 강화하고 있다. 아프리카 돼지열병에 이어 닭고기까지 생산에 차질이 빚어질 경우 베트남중앙은행이 공들여 관리해 온 4%대의 인플레이션 관리도 흔들릴 가능성이 크다. 롯데리아, KFC 등 베트남 내 주요 패스트푸드 매장에선 치킨 버거에 들어갈 닭고기 패티의 수급에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리아 관계자는 “아직 조류독감의 피해는 감지되지 않고 있다”며 “매장 내 치킨 공급이 원할치 않은 건 장기간 설 연휴 직후에 수급에 애로가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박동휘 하노이 특파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