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어막을 것 하나 없이 구멍 난 배에 타고 있는 나이 같아요. 하지만 여든 살의 연극배우가 얼마나 할 일이 많은지 때로 생각해요. 무대를 버리고 남은 재능 속으로 사라지는 것과 계속 살아남아 끝없이 자신을 들어올리는 것, 어느 쪽이 옳을까요.”
연극계를 대표하는 원로배우 박정자(78)는 스스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된 인물이다. 그는 1962년 연극 ‘페드라’로 데뷔한 이후 단 한 해도 쉬지 않고 연극 무대에 올랐다. 발에 깁스를 하고도, 임신 마지막 달에도 관객들 앞에 섰다. 80세를 앞둔 지금도 그 열정엔 변함이 없다. “전 다음 정거장까지 밀고 나갈 수밖에 없어요. 나머지 극장 밖의 시간은 그냥 기다리는 인생 같아요.” 그렇게 58년간 펼쳐 온 연극 인생을 담은 ‘박정자의 배우론-노래처럼 말해줘’를 선보인다. 공연은 6일부터 16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열린다.
박정자는 ‘키 큰 세 여자’ ‘나는 너다’ ‘햄릿’ ‘오이디푸스’ ‘신의 아그네스’ ‘피의 결혼’ ‘19 그리고 80’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다. 백상예술대상, 이해랑연극상, 3·1문화상 등 수많은 수상의 영예도 안았다.
이번 공연에선 그가 그동안 연기했던 대표 캐릭터들을 재탄생시킨다. 딸이 사랑하는 남자를 차지하려 남자를 우물에 가둔 엄마, 스무 살 어린 남자에게 모든 걸 준 배우, 아기를 죽인 수녀를 싸고도는 원장 수녀, 카페에서 노래하는 늙은 창녀 등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인다. 공연 제작사 뮤직웰 관계자는 “음악을 따라 공연이 전개되며 박정자의 내레이션이 함께 어우러진다”며 “박정자란 한 배우의 얼굴이 주는 감동과 열정이 관객들에게 큰 울림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공연은 음악과 영상 등 다양한 장르가 어우러지는 ‘크로스오버’ 형식으로 진행된다. 여섯 곡의 노래도 라이브로 울려퍼진다. 영화 ‘페드라’의 OST ‘사랑의 테마’,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박정자가 직접 냈던 음반 ‘아직은 마흔네살’의 타이틀곡 ‘검은 옷 빨간 장미’ 등이다. 박정자는 “조명이 꺼지고 커튼이 내려오기 전까지도 전 아직 부를 노래가 많이 남아 있다”고 강조했다.
연극계 대표 배우의 무대인 만큼 국내 유명 스태프들이 총출동한다. 피아니스트 허대욱이 음악감독 겸 피아노 연주자로 무대에 오른다. 뮤지컬 ‘스위니토드’ ‘레베카’ 등을 올린 무대 디자이너 정승호도 참여한다. 대본은 패션잡지 ‘지큐’ 편집장 출신이자 모노드라마 ‘11월의 왈츠’ 등을 썼던 이충걸 작가가 집필했다. 연출은 연극 ‘프루프’ ‘버자이너 모놀로그’ 등을 무대에 올린 이유리가 맡았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