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웅진그룹 창고에는 먼지를 뒤집어쓴 정수기가 쌓여갔다. 윤석금 회장은 ‘이러다 회사가 부도나는 것 아닌가’ 하고 고민에 빠졌다. 그때 ‘차라리 사람들에게 정수기를 빌려줘 볼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국내 렌털(대여)산업의 첫걸음이다. 유통의 패러다임이 ‘판매’에서 ‘대여’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렌털 비즈니스가 시작된 지 올해로 22년. 렌털산업은 어느덧 소비시장의 대세로 자리잡았다. 초고가 제품과 정수기 등 일부 생활가전에서 출발한 시장은 렌털을 안 하는 품목을 찾기 힘들 만큼 생활 깊숙이 파고들었다. ‘한국인의 일상은 이제 렌털로 시작해 렌털로 마무리된다.’ 얼마 전 소셜미디어(SNS)에 올라온 이야기다.
렌털은 빠른 성장세 못지않게 성장잠재력이 무궁무진한 분야다. KT경제경영연구소에 따르면 국내 렌털시장은 2016년 25조9000억원에서 올해 40조1000억원을 기록해 4년간 연평균 11.5%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정수기와 공기청정기, 안마의자, 매트리스 등 가정용품 렌털시장은 같은 기간 5조5000억원에서 10조7000억원으로 두 배 가까이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기업에는 ‘기회의 땅’이다. SK매직을 비롯해 많은 중견기업이 렌털시장에서 회사의 외형과 내실을 키우며 대기업을 향한 꿈을 쌓아올린다. 시장의 위상도 달라졌다. 수요를 예측하기 힘든 데다 사후서비스(AS)가 어려워 국내 진출을 주저하던 수입 명품 가전업체도 국내 렌털시장에 앞다퉈 뛰어들고 있다. 스위스의 로라스타는 400만원대 최고급 다리미를 월 2만원대에 빌려준다.
렌털은 중소기업과 후발 업체의 전유물이 아니라 위축된 소비심리를 자극해 산업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을 대안으로도 주목받는다. 장기화된 경기 불황과 1인 가구 증가, 공유경제 확산은 렌털 품목의 무한 확장과 성장을 유인하고 있다.
한국렌탈협회가 추산하는 국내 렌털업체는 2만5000여 개다. 시장이 커지는 만큼 경쟁이 치열하고 품목도 다양해지고 있다. 생활가전과 가정용품, 자동차에 이어 각종 소비재로 확대되는 추세다. 수천만원짜리 차와 TV 등 내구재까지 빌리는 게 더 이상 어색한 일이 아니다.
김정은 기자 like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