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천연두로 남미 원주민 90% 사망…스페인 독감, 5천만 목숨 앗아가

입력 2020-02-07 17:21
수정 2020-02-08 01:29
21세기 들어서도 인류 위협하는 전염병

1980년 5월 8일 세계보건기구(WHO)가 ‘천연두 종식’을 선언했을 때만 해도 인류는 ‘전염병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2003년 사스(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를 시작으로 2009년 신종 인플루엔자(신종플루),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2016년 지카바이러스에 이어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우한 폐렴)까지 21세기 들어서도 인류를 위협하는 대규모 전염병 발생이 줄을 잇고 있다. 세계화로 국경을 넘어선 교류가 활발해진 영향으로 분석된다.


교류와 함께 커진 전염병 위협

인류사를 바꾼 대규모 전염병들은 교류 확대의 ‘부산물’ 성격이 강했다. 이전에는 접하지 않던 지역과의 교류가 늘면서 새로운 풍토·생물과의 접촉이 자연스럽게 증가했다. 이에 따라 각 지역에 독자적으로 존재하던 질병이 세계로 퍼졌고 새로운 병도 등장했다.

전염병 확산은 여러 지역으로 사람이 이동하고 좁은 공간에 운집하며 생활환경이 악화한 전쟁 시기에 특히 두드러졌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고대 아테네를 그로기 상태로 몰아넣은 정체불명의 역병이 대표적이다.

정치적 요인, 과학 발전에 따라 과거 전혀 별개의 세계로 작동하던 생태계와 접촉한 것이 재앙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근세 초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도 몽골제국 등장으로 동서 교류가 활발해진 점이 근본 원인으로 꼽힌다. 역사학자 윌리엄 맥닐에 따르면 흑사병은 원래 미얀마 지역 풍토병이었지만 몽골제국의 확장으로 최근 우한 폐렴이 발생한 중국 후베이 지역 등에서 위세를 떨친 뒤 동서교역로를 따라 유럽까지 서진했다.

16세기 중남미의 천연두는 ‘콜럼버스의 교환(인간의 교류로 인해 발생하는 생태학적 변화)’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총, 균, 쇠》의 저자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이 때문에 남미 인구 90%가 사망했고 유럽인들이 남미를 쉽게 정복했다고 봤다. 19세기 제국주의 확대와 함께 인도의 풍토병이 세계 각지로 퍼져 여섯 차례나 대유행한 콜레라와 20세기 초 500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스페인 독감 사례도 비슷하다. 6·25전쟁 당시 유엔군과 중공군을 괴롭힌 한타바이러스는 한탄강 유역에 서식하던 들쥐를 매개로 번졌다.

우한 폐렴도 과거 다른 전염병 확산 공식대로 퍼지고 있다. 우한 폐렴의 진원지 우한시에는 박쥐나 사향고양이, 뱀 등 야생동물을 먹는 식문화가 남아 있다. 오래전부터 가축화가 진행된 소, 돼지, 개, 닭 등은 이미 많은 생물학적 교류가 이뤄져 치명적인 변이형 인수(人獸) 공통 질병이 생길 가능성이 작지만 야생동물과의 접촉이 늘면서 새로운 바이러스가 등장했다고 전염병 학자들은 보고 있다. 여기에 1100만 명의 사람이 조밀하게 살고 있고, 중국 9개 성을 연결하는 교통 요지라는 점에서 질병 발생과 확산에 기름을 부었다는 설명이다.

중국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지역 풍토병’이 세계로 빠르게 퍼지며 충격파를 키웠다. 세계 경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사스 당시인 2003년 4%에 그쳤지만 지금은 17%에 이른다. 2003년 사스로 인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성장률이 0.6%포인트 낮아지고, 세계 여행객의 이동거리가 전년 대비 5% 감소(국제항공운송협회)하는 충격을 받았지만 이번엔 훨씬 영향이 클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다. 중국인의 해외 접촉도 크게 늘어 2000년 연간 1047만 명에 불과하던 중국의 해외 관광객 규모는 2019년 1억6600만 명으로 16배 넘게 증가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전염병과의 싸움

세균과 바이러스 발견, 위생 환경 및 도시 시스템 개선, 예방 접종과 의학기술 발전 등으로 전염병과의 전쟁 양태는 예전에 비해 많이 개선됐다. 역설적으로 전염병 대유행이 방역과 의학 발전을 이끌었다. 콜레라 치료를 위해 세계 주요 도시의 상·하수도 시스템이 정비됐다. 1918~1920년 5억 명이 감염돼 5000만 명 이상이 사망한 스페인 독감을 계기로는 예방 접종과 의료기관 종사자의 안전이 중요하다는 점이 부각됐다. 스페인 독감 확산 초기에 의료 종사자가 많이 감염되면서 병원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아 희생자가 늘었기 때문이다. 이후 예방 접종의 중요성이 강조됐고 의료기관 종사자는 최우선적·의무적으로 접종하게 됐다.

하지만 전염병과의 ‘전쟁의 끝’은 여전히 보이지 않고 있다. WHO가 국제 공중보건 비상사태를 선언한 사례만 따져봐도 2009년 신종플루, 2014년 소아마비, 2014년 서아프리카 에볼라, 2016년 지카바이러스 감염증, 2019년 콩고민주공화국 에볼라, 2020년 우한 폐렴 등 여섯 차례에 이른다.

이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은 질병 스스로 진화를 거듭하고, 과거에는 조합을 상상하기 어려웠던 동식물과 인간의 접촉이 늘면서 변형 바이러스의 등장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지구 온난화로 시베리아 영구동토 지대나 티베트 고원 등지에 묻혀 있던 과거의 치명적 전염병균이 다시 퍼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대규모 전염병의 위협은 앞으로도 글로벌 경제와 인류의 생활을 위협할 상수로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 많다.

도쿄=김동욱 특파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