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10년의 첫해가 시작됐다. 2020년 새해를 맞이한 대한민국은 기로에 서 있다. 몇 갈래 길이 앞에 놓여 있다.
하나는 ‘아르헨티나로의 길’이다. 100년 전 아르헨티나는 세계 10위권의 신대륙 신흥 선진국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남반구의 파리’로 불렸고, 돈과 사람이 몰려들었다. 이러던 아르헨티나에 20세기는 끝없는 추락의 역사였다. 정치 혼란, 초인플레이션, 국가 부도는 일상이 됐다. 경제는 반 토막 나고, 중산층은 붕괴되고, 나라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쪼개졌다. 아르헨티나는 경제위기를 감당할 수 없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대상에 가장 자주 오르는 나라가 돼버렸다.
또 다른 길은 ‘일본화의 길’이다. 1980년대 일본의 상승세는 거침없었다. 세계는 소형화, 완벽화를 추구하는 일본 제품에 열광했다. 기모노를 입은 자유의 여신상이 미국 잡지의 표지로 등장했다. 일본이 미국을 제치고 경제대국으로 등극하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였다. 그런 일본이 1990년대부터 별안간 침체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일시적 침체가 아니라 성장의 시계가 아예 멈춘 ‘잃어버린 20년’의 긴 겨울로 이어졌다. 세계 역사상 경험하지 못했던 속도의 고령화, 저출산은 일본을 ‘인구절벽’으로 몰고 갔다. 나라는 활력을 잃어갔다. 급기야 ‘인구 1억 지키기’를 국가 목표로 내세울 만큼 상황은 다급해졌다.
아르헨티나의 몰락, 일본 쇠락의 공통점은 ‘무능한 정치’에 있다. 아르헨티나는 수십 년간 지속된 수입대체 정책이 화근이었다. 국제무역을 제국주의 음모로 보는 종속이론에 영혼을 팔지 않았으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국가보조금 따내기 경쟁에 온 나라가 골몰했고, 기업의 성패는 권력과의 거리로 결정됐다. 세계시장과 격리된 국산화 정책은 성공할 리 만무했다. 정경유착은 부패를 고착화시켰고, 기득권은 독버섯처럼 커졌다. 분노를 무기로 집권한 좌파 정부는 재분배 정책으로 일관했다. 무능한 좌파 정치에 대한 환멸은 우파 정부를 탄생시켰지만, 그들은 부패했다. 부패, 무능, 혼란의 삼중주 속에 아르헨티나는 추락해갔다.
일본은 거품이 꺼지면서 위기의 징후가 곳곳에서 관찰됐지만, 행동방식은 바뀌지 않았다. 묻지마 토목사업, 건설사업이 균형발전의 이름으로 계속됐다. 전국 곳곳에 신공항, 공공기관 청사가 들어섰다. 지속적인 불황은 이들을 유령화시켰다. 일본 최대 항공사였던 JAL도 파산을 피할 수 없었다. 적자가 쌓여갔지만 정부 관료들의 낙하산 인사 잔치는 계속됐고, 경영진은 항공노선 조정을 꺼렸고, 호시절의 고임금은 요지부동이었다. 누구도 먼저 나서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일본은 더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르헨티나, 일본 모두 기득권 세력은 자기 몫 지키기에 급급해 변화와 개혁의 시간을 놓쳤다. 침체는 위기로 심화됐고, 치유 불가능한 상태로 깊어졌다. 최근 수년간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도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한국을 지금의 제조업 강국, 선진 경제로 끌고 온 방식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데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세력 간 조선왕조 시대를 연상케 하는 권력투쟁은 한국호를 ‘퍼펙트 스톰’이 밀려오는 망망대해에서 표류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운명을 탓하고 있을 수는 없다. 한국엔 또 다른 길도 있다. 제조업 위기를 극복하고 세계 최고의 디지털 창업국가로 부상한 미국의 길은 어떤가. 구글, 아마존, 애플, 페이스북, 넷플릭스, 우버, 에어비앤비 등을 앞세워 미국이 21세기 기술 프런티어를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정치 논리가 배제된, 최고를 추구할 수 있는 혁신 생태계를 구축한 덕분이다.
한국엔 추격과 추월의 기억이 있다. 20세기 마지막 10년을 “산업화엔 늦었지만 정보화엔 앞서가자”며 정보기술(IT) 강국으로 부상했던 한국이다. 매년 1월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CES는 미래 산업기술의 경연장이다. 올해엔 160여 개국에서 4500여 개 기업, 18만 명이 참가했다. 한국 기업은 390개, 한국인 참석자는 1만 명에 육박한다는 소식에서 디지털 혁명 시대, 한국의 새로운 길을 엿본다. 한국 앞에 놓인 여러 갈래 길. 거기엔 운명 같은 것은 없다. 한국은 어떤 10년을 만들어 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