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범의 별 헤는 밤] 오리온과 함께하는 겨울 밤하늘

입력 2020-02-19 18:38
수정 2020-02-20 00:11
겨울 밤하늘의 가장 멋진 별자리를 꼽으라면 단연 오리온자리다. 오리온자리는 초저녁에 동쪽 하늘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치우친 위치에 덩그러니 떠오른다. 이 별자리의 왼쪽 위에 붉게 빛나는 베텔게우스와 오리온자리 아래쪽에 있는 큰개자리의 시리우스, 왼쪽 작은개자리의 프로키온은 육안으로 볼 때 거의 정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이들을 ‘겨울철 대삼각형’으로 부른다. 워낙 밝은 별이어서 도심에서도 볼 수 있다. 다른 계절에 비해 겨울에는 밝은 은하수를 거의 볼 수 없기 때문에 별자리가 두드러지게 잘 드러난다.

2017년 2월 초, 호주 사이딩스프링천문대에서 망원경 거울의 코팅작업을 한 적이 있다. 자정을 훌쩍 넘기고 나와 보니 여름철 대표 별자리인 전갈자리가 은하수와 같이 멋지게 떠올랐고, 반대쪽 하늘 끝에서 오리온자리가 뒤집어져 지고 있었다. 오랜 이야기에 따르면 오리온은 뛰어난 사냥꾼이었고 큰개와 작은개는 오리온이 데리고 다니던 사냥개였다고 한다. 그런데 오리온은 전갈에 물려 죽었고 밤하늘의 별자리가 됐는데, 그래서 전갈자리가 나타나면 오리온은 전갈을 피해 서쪽 하늘로 진다고 한다. 어린 마음에 오리온이 참 불쌍해 보였는데 딱 그 모습이었다. 왠지 서쪽으로 지는 오리온자리는 전갈을 피해 숨어들 듯 희미해져 있었다.

전갈 독침 피하는 사냥꾼 오리온

북반구에 있는 보현산천문대에서는 두 별자리가 동시에 뜬 모습을 볼 수 없고, 새벽에 전갈자리가 나타나면 이미 서쪽 하늘에서는 오리온자리가 사라져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옛이야기가 좀 더 와 닿는다. 이것은 지구가 속한 태양계가 우리 은하의 남쪽에 치우쳐 있어 북반구에 자리한 우리나라에서는 여름에 낮게 떠서 지나가는 은하수의 중심부가 남반구에서는 머리 위로 높게 올라오기 때문이다. 즉 남반구에서 훨씬 밝고 넓게 은하수를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많은 천체사진가들이 굳이 남반구의 칠레나 호주로 은하수를 찍으러 가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호주의 2월은 한여름이지만 한국에선 한겨울이다. 호주에 가기 2주 전 보현산천문대에서 한참 관측하다가 밖으로 나와 1.8m 망원경 돔 옆을 돌아가니 서쪽 하늘에 어느새 오리온자리가 지고 있었다. 남반구 하늘과 달리 옆으로 누워서 지고 있었다. 뜰 때는 꼿꼿이 서서 올라오지만 밤새 하늘을 가로질러 지친 듯 누워서 진다. 그 위로 옅은 겨울 은하수가 이불을 덮어주듯 수평으로 길게 놓였다. 겨울 은하수는 워낙 희미해서 있는지도 잘 모르지만 어둡고 맑은 대기에서는 그래도 희미하게 나타난다. 사실 은하수는 우리가 속한 은하를 보는 것이고, 우리는 그 속에서 보기 때문에 은하 중심부 쪽은 화려하고 밝게 빛나지만 그 반대쪽은 희미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게 360도로 빙 둘러서 은하수가 존재한다.

호주에서와 달리 보현산천문대에서 보면 오리온자리가 전갈을 피해 사라진다는 이야기보다는 신의 시기로 죽었다는 또 다른 이야기가 맞을까 싶기도 하다. 어린 시절에 가진 상상이 이제는 많이 희석됐다. 오리온을 죽일 정도로 강한 독을 지닌 전갈이 무섭기만 했지만 그 또한 희석돼 독침을 잔뜩 치켜세운 모습은 멋있기만 하다.

오리온자리가 지는 모습을 보면서 작은 돌탑을 앞에 두고 아주 낮은 삼각대에 넓은 시야의 단초점렌즈를 부착한 카메라를 고정해 약 20초에 한 장씩 반복해서 연속 촬영을 했다. 해 뜰 무렵까지 1.8m 망원경으로 관측을 계속하면서 밖으로 나와 카메라를 살폈고, 배터리가 다 돼 조용해질 때까지 찍었다. 이렇게 찍은 영상을 모아서 별이 흐르는 일주운동 사진을 만들었는데 문득 바닥에 쌓인 하얀 눈에 반사된 별빛이 보였다. 동화 속에 나올 것 같은 장면이 됐다. 연구를 위한 관측은 모두 컴퓨터로 이뤄지기 때문에 별을 직접 보는 즐거움을 느끼기 어렵다. 잠깐씩 나가서 밤하늘을 보는 것은 거의 12시간씩 지속하는 겨울밤 관측의 지루함을 잊게 해주는 즐거움이다.

별자리 관측은 천문학의 청량제

해마다 1월이면 마음이 다소 복잡하다. 지난 한 해 연구 실적도 챙겨야 하고, 연구보고서도 작성해야 하는 등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많다. 무엇보다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압박감이 크다. 좋은 연구 결과를 이루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논문 발표만 해도 어려운 심사를 거쳐 게재 승인을 받아도 게재되는 시점까지 길게는 3~4개월씩 걸리기 때문에 이미 무언가 연구 결과를 갖고 있어야 한 해의 연구 실적을 이룰 수 있다.

사실 천문학 연구는 무척 힘이 드는 과정이다. 단 한 장의 관측 자료로 논문이 되기도 하지만 보통은 여러 날, 심지어 수년의 관측 자료가 필요하다. 천문학자라고 하면 별만 보고 낭만을 그린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연구 결과를 얻는 과정은 다 비슷하다. 어떤 때는 며칠씩 밤을 새우며 논문을 작성하기도 하고, 체력이 달려서 중도에 포기하기도 한다.

그래도 천문학은 별을 보는 즐거움이 있다. 겨울 밤하늘에 화려하게 모습을 드러낸 오리온자리를 기대하면서 오늘도 별을 보기 위해 즐겁게 천문대로 오른다.

전영범 < 한국천문연구원 책임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