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프리카 지중해에 접한 리비아는 ‘슬픈 나라’다. 고대부터 페니키아와 로마의 지배를 받았고, 7세기에는 아랍에 정복됐다. 오스만제국과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됐다가 2차 세계대전 후 영국·프랑스의 분할통치를 거쳐 1951년에 독립했다. 이후에도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 갈등을 겪고 있다.
리비아의 국토 넓이는 한반도의 8배(175만9540㎢)에 이르지만 90%가 사막이다. 독립할 때도 최빈국을 면치 못했다. 그러다가 1959년 유전이 발견되면서 아프리카 최대 산유국이 됐다. 2011년에는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민주화 운동인 ‘아랍의 봄’을 맞아 42년 독재자 무아마르 알 카다피를 축출했다.
이후 평화와 번영이 찾아오는가 싶었으나 내전으로 인한 유혈 사태가 이어지고 있다. 2015년 출범한 리비아통합정부는 내분에 휩싸였고, 최대 군벌인 리비아국민군이 국토의 4분의 3을 장악했다. 그 사이에 1700여 개의 무장정파가 난립하면서 혼란이 가중됐다.
왜 이렇게 됐을까. 가장 큰 원인은 뿌리 깊은 지역 갈등이다. 170여 개 부족으로 이뤄진 이 나라는 예부터 서부 트리폴리타니아(트리폴리 세력권)와 동부 키레나이카(벵가지 세력권)로 양분돼 있었다. 독립 후 18년간 리비아왕국을 통치한 이드리스 1세는 동부 출신,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한 카다피는 서부 출신이다. 이런 동·서 갈등에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의 대립, 주변국과 열강의 개입까지 겹쳤다.
이탈리아는 리비아를 식민 통치했던 과거와 석유공장의 연고를 내세우며 통합정부를 지원하고, 프랑스는 테러 단체 소탕에 앞장선 국민군 편을 들고 있다.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들과 터키, 이들과 사이가 나쁜 이집트·사우디아라비아도 각각 자기편을 점찍고는 무기를 보내고 있다. 각국 정상들이 몇 차례 휴전 논의를 가졌지만 아직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유럽 정상들의 중재회의를 앞둔 지난 18일에는 리비아 동부 군벌이 송유관을 막고 원유 수출항을 봉쇄하는 바람에 국제유가가 치솟았다. 전란 속에 리비아 국민의 고통은 커지고 있다. 최근 9개월간 숨진 사람만 2300여 명이고, 난민은 15만 명이 넘는다. ‘아랍의 봄’에 흘렸던 감격의 눈물이 ‘아랍의 겨울’로 얼어붙는 모습이다. 새로운 세상을 위해 치러야 할 ‘민주화 비용’이 그만큼 늘고 있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