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보고서에 묻힌 문 대통령을 위한 조언

입력 2020-01-20 18:23
수정 2020-01-21 00:25
“가봤나?” 향년 99세로 세상을 떠난 롯데그룹 창업자 신격호 명예회장이 생전 직원들에게 자주 하던 말이다. 보고서가 아니라 현장에 답이 있다는 게 그의 경영철학이다.

청와대 인근 삼청동 거리를 걸을 때마다 경제 낙관론을 서슴없이 꺼내드는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이 되새길 필요가 있는 말이기도 하다. 삼청동 거리로 들어서는 팔판삼거리부터 국무총리 공관까지 약 200m 거리에는 ‘임대 문의’ 문구가 큼지막하게 붙은 건물이 11곳에 달한다.

굳이 골목 안을 기웃거리지 않아도 대로변에만 5개 건물 1층이 연달아 스산하게 비어 있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감사원 진입로 초입까지 범위를 넓히면 어림잡아 20곳의 상점이 텅 빈 채 겨울을 나고 있다.

이 짧은 거리에 문 대통령이 처한 모든 천태만상이 담겨 있기도 하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쫓겨난 영세 자영업자의 한숨, 한국 관광산업의 고질적 문제인 콘텐츠 부족, 상권 몰락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임대료를 낮추길 꺼리는 건물주, 조국 사태 이후 주말마다 집회 시위로 몸살을 앓는 거리, 소음과 교통 혼잡으로 발길을 돌려야만 하는 선의의 피해자들 말이다.

문 대통령 집무실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삼청동의 체감 경기는 그 어느 때보다 위기다. 하지만 대통령의 신년사를 포함해 연초 정부가 내놓는 경기 전망은 긍정적인 거시지표 일색이다.

이런데도 문 대통령은 여전히 산더미처럼 쌓은 보고서와 씨름 중이라고 한다. 청와대를 떠난 한 청와대 핵심 참모는 “문 대통령이 보고서를 읽느라 밤잠을 설치면 다음날 눈이 퉁퉁 부어 있다”며 “그래도 그걸 다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데 최근 그런 모습이 많이 보인다”고 말했다.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이 지난해 임명 직후 참모들에게 보고서를 줄이라고 지시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새 대통령에게 전달되는 보고서의 양은 다시 늘었고, 문 대통령이 쉽게 잠들 수 없는 환경이 됐다고 한다.

청와대 내에서 보고서를 잘 쓰는 참모가 눈에 띄는 웃지 못할 모습도 다시 회자된다. 기업은행장에 임명된 윤종원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근무 당시 깔끔한 보고서로 관심과 질투의 대상이 됐다. 당시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수석급 인사는 “윤 수석이 올린 보고서에 자극받아 발표 자료를 작성하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대통령 눈에 띄는 보고서를 올리기 위해 머리를 싸매는 참모들에게 신 명예회장이 했던 질문을 던져보면 어떨까. 기회가 된다면 문 대통령이 직접 암행에 나서는 것도 방법일지 모른다. 문 대통령이 새해 들어 줄곧 외치는 ‘확실한 변화’가 예쁘게 꾸며진 보고서에 담겨 있진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