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엔 들고 일본行…껌에서 백화점·화학으로 영토 넓힌 '미다스 辛'

입력 2020-01-19 17:42
수정 2020-01-20 00:47

19일 타계한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은 맨손으로 시작해 타고난 성실성에다 뛰어난 투자 감각과 안목으로 한국과 일본에서 ‘롯데 왕국’을 건설한 입지전적인 기업인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제과사업과 부동산 투자로 큰돈을 벌고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한국에 대한 투자를 본격화해 재계 5위의 롯데그룹을 일궈냈다. 동시대에 한국과 일본 양국 산업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재계의 존경을 받았다.

작가를 꿈꾸던 가난한 청년

신 명예회장은 1921년 10월 4일 울산 울주군 삼남면 둔기리의 중농 가정에서 5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에 배움을 열망하던 ‘청년 신격호’는 만 20세이던 1942년 단돈 83엔을 들고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 생활을 시작했다. 낮에는 신문과 우유배달, 가게 아르바이트 등으로 돈을 벌고 밤에는 와세다대 응용화학부 야간 과정에서 공부했다.

신 명예회장의 어린 시절 꿈은 작가였다. 유학 시절 어렵게 끼니를 이어갈 때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대학 전공은 응용화학이었지만, 그의 손에 들린 건 문학책이었다. 젊은 시절 문학책을 읽으며 온몸으로 체득한 감수성과 상상력은 훗날 사업가로 성공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롯데’라는 회사 이름도 그의 문학적 감수성에서 나왔다. 롯데는 신 명예회장이 학창 시절 읽은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주인공으로 나오는 ‘샤롯데’에서 따왔다.


일본 껌·초콜릿 시장 제패

문학도가 되겠다는 꿈은 1944년 그의 성실성을 눈여겨본 일본인 전당포 업자의 제의로 선반용 기름 제조사업에 뛰어들면서 바뀌었다. 6만엔을 빌려 공장을 설립해 기업인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이 공장은 제대로 가동해보지도 못하고 미군 폭격으로 전소됐다. 신 명예회장은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돈을 벌어 출자금을 갚겠다는 투지를 불살랐다. 그가 평생을 기업인으로 살게 되는 전환점이었다.

일본의 패전으로 미군이 주둔하면서 서양 문명의 상징인 껌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껌 사업에 뛰어들었다. 사업 초기 변변한 장난감이 없던 시절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풍선껌으로 승부했다. 껌을 작은 대나무 대롱 끝에 대고 불 수 있도록 풍선껌과 대나무 대롱을 함께 포장했다. 롯데의 풍선껌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신 명예회장은 큰 성공을 거뒀다. 이어 제조 방법이 까다로워 제과의 중공업이라 불리는 초콜릿 시장을 장악했다. 비스킷과 아이스크림, 청량음료, 캔디 등에도 차례로 진출해 롯데를 일본 최대의 종합 제과업체로 발전시켰다.

그는 타고난 투자 감각으로 제과사업에서 번 돈으로 도쿄 변두리 땅을 싼값에 사들이며 부동산업에 뛰어들었다.

작은 것을 놓치지 않는 사업가

신 명예회장은 여느 대기업 총수와 달리 사소한 일도 직접 챙기는 스타일이었다. 홀수달은 한국, 짝수달은 일본에서 업무를 보는 ‘셔틀 경영’과 불시에 백화점 호텔 마트 등의 매장을 순시하는 ‘현장 경영’은 미수(88세)를 넘기고도 계속됐다.

계열사 사장들로부터 보고받을 땐 “이 숫자 확실한 거지?”라며 꼼꼼하게 따져물었고, 매장을 둘러볼 땐 안내하는 임원에게 버스 노선부터 입점한 롯데리아의 좌석 수까지 일일이 챙겼다. 한번은 사무실 복도를 걷다가 담당 임원에게 “왜 저 끝에는 자동판매기를 안 놨어?”라고 물었다고 한다. 복도 코너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데 대한 질책이었다.

롯데 잠실점 설립·미도파 인수한 승부사

신 명예회장은 기회다 싶을 땐 누구보다 과감하게 투자했다. 롯데 잠실점이 대표적인 사례다. 1980년대 중반 서울지하철 2호선 잠실역 일대는 황량한 모래벌판이었다. 석촌호수는 물웅덩이였고, 비가 오면 한강이 범람해 물이 차는 유수지였다. 이런 곳에 당시 돈으로 6500억원을 들여 테마파크와 백화점을 짓는다는 건 ‘미친 짓’에 가까웠다. 임원들도 “배후 상권이 너무 없다”고 만류했지만, 신 명예회장은 “상권은 만들 수도 있다”고 밀어붙였다. “2년 내에 잠실이 명동만 한 상권이 될 것”이란 그의 예측은 곧 현실로 증명됐다.

2002년 롯데가 미도파백화점을 인수할 때도 신 명예회장은 과감했다. 당시 롯데와 인수전을 벌이던 현대보다 300억~400억원 정도만 더 주면 되는 상황이었지만 신 명예회장은 “800억원 더 써내”라고 지시했다.

‘롯데가 내 삶’이었던 경영인

신 명예회장이 30여 년 전 한국경제신문에 ‘정열 정직 봉사’란 제목으로 기고한 칼럼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일할 때 열정이 치솟는 사람은 그 일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 열정은 상대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다. 사랑을 갖고 있으면 어떤 어려운 일도 즐겁게 해내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떤 좋은 조건에서도 즐거움을 맛볼 수 없다. 천하에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기 일에 열정을 갖는 사람이요, 가장 불행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신 명예회장은 스스로 얘기한 ‘자기 일에 열정을 가진 사람’의 전형이었다. 80세가 넘어서도 젊은이들도 버거워할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는 셔틀 경영과 현장 경영뿐만 아니라 한국에 체류할 땐 매일 2~3개 계열사 사장들로부터 현황 보고를 받았다.

이철우 전 롯데쇼핑 백화점부문 총괄사장이 1990년대 초 “이제 연세도 있으니 업무 보고도 반나절만 받으시라”고 조언했을 때 신 명예회장은 “이게 내 삶이다. 반나절만 일하면 그만큼 내 삶이 축소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이 전 사장은 그런 그를 두고 “‘알기만 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知之者 不如好之者,好之者 不如樂之者)’라는 《논어》 ‘옹야(雍也)’편에 나오는 ‘즐기는 사람’의 대표적인 예”라고 말했다.

안효주 기자 j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