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껌으로 시작해 재계 5위 롯데 일군 '경영 신화' 신격호 별세

입력 2020-01-19 17:33
수정 2020-01-19 17:47

롯데그룹 창업주인 신격호 명예회장이 19일 오후 4시29분 향년 99세로 별세했다. 맨주먹으로 재계 5위 기업을 일궈낸 한국 유통업계의 큰 별이 졌다. 신 명예회장의 별세로 '창업 1세대 경영인'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됐다.

◆신격호, 맨손으로 재계 5위 일군 '롯데의 아버지'

신 명예회장은 타지인 일본에서 맨손으로 시작해 재계 5위의 롯데그룹을 일군 자수성가형 기업가다.

1921년 울산에서 5남 5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만 20세가 되던 1942년 사촌형이 마련해준 노잣돈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와세다대 응용화학부(야간)에 적을 뒀지만 낮에는 신문과 우유를 배달하는 '주경야독' 생활을 이어갔다.

첫 사업은 1944년 선반(절삭공구)용 기름 제조 공장이었으나 2차 대전에 공장이 전소해 5만엔의 빚만 남았다.

좌절하지 않고 다시 사업자금을 마련해 1946년 세운 히카리특수화학연구소란 공장에서 비누와 화장품을 만들어 재기에 성공했다. 이후 껌 사업에 뛰어들어 1948년 제과회사 롯데를 설립했다. 문학을 좋아해 기업명 롯데도 독일 작가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이름에서 비롯됐다. 롯데는 껌 이후 초콜릿과 비스킷, 아이스크림 등의 제품도 성공을 거뒀다.

고국인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한 것은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다.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했고, 유통과 관광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1973년 서울 소공동에 선보인 롯데호텔과 1979년 롯데쇼핑센터(현 롯데백화점 본점)를 열면서 입지를 굳혔고 이후 한국경제와 함께 성장을 거듭했다. 롯데는 화학과 건설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면서 자산규모 100조원, 재계 5위 그룹으로 우뚝 섰다.

이 같은 '신격호 신화'의 비결로는 남다른 카리스마와 현장경영이 꼽힌다. 2011년 당시 신동빈 롯데 부회장을 회장으로 승진시키고 본인은 총괄회장을 맡은 후에도 백화점, 마트 등을 직접 방문해 챙긴 일화는 유명하다.

신 명예회장은 특히 롯데월드, 롯데면세점 등 관광산업에 대규모 투자를 했다. '부존자원이 빈약한 한국은 관광입국을 이뤄야 한다'는 신념으로 국내 호텔 브랜드 최초 해외진출 등 관련 산업의 발전을 이끌었다. 1995년에는 관광산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끌어올린 공로로 해당 분야에서는 처음으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숙원사업이던 국내 최고층 빌딩인 롯데월드타워 건설 역시 이 같은 뜻을 바탕으로 시작해 2017년 개장에 성공했다. 1987년 부지를 산 지 30년 만이다. "세계 최고의 것이 있어야 외국 관광객들을 한국으로 유치할 수 있다"는 신 명예회장의 꿈이 실현된 것이다.

◆ 70년간 경영 이끌어…'창업 1세대 경영인' 시대 막 내려

신 명예회장은 70년 간 경영에 힘을 쏟았으나 순탄치 않은 말년을 보냈다. 2015년 장남인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차남인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간의 경영권 분쟁이 불거지면서 신 명예회장은 일본 롯데홀딩스 대표에서 해임됐다. 국내 계열사 이사직에서도 퇴임해 70년 만에 경영에서 손을 놓게 됐다.

재계 5위의 그룹을 세웠지만 자녀에게 승계를 제대로 하지 못해 분쟁 불씨를 남겼다는 지적이 일각에서는 나오기도 했다. 경영권 분쟁이 이어지면서 정신건강 문제가 공개되고 수감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법원은 '정상적인 사무처리 능력이 없다'며 사단법인 선을 한정후견인(법정대리인)으로 지정했다. 이후 경영비리 혐의로 2017년 12월 징역 4년·벌금 35억원을 선고받았으나 고령인 점 등 건강상의 이유로 법정 구속은 면했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는 신 명예회장에 대해 "전근대적이던 한국 유통산업의 현대화를 이끌었다"며 "국내 유통업계의 경쟁과 성장을 촉발한 대표적인 창업 1세대 경영인"이라고 평가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시게미쓰 하츠코(重光初子) 여사와 장녀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장남 신 전 부회장, 차님 신 회장, 사실혼 관계인 서미경 씨와 딸 신유미 씨 등이 있다.

한편, 신 명예회장의 별세와 함께 고(故) 이병철 삼성 회장, 정주영 현대 회장, 구인회 LG 회장, 최종현 SK 회장 등이 재계를 이끈 '창업 1세대 경영인' 시대가 막을 내렸다.

오정민 한경닷컴 기자 bloomi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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