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북한이 이른바 ‘새로운 길’로 들어서기 위한 정면돌파 의지를 거듭 밝히고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미국을 겨냥해 “충격적인 실제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겁박한 데 이어 외교 원로인 김계관 외무성 고문이 “대북 제재 완화와 핵을 바꾸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성과 없이 평행선만 그리는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으름장이다. ‘연말 시한’을 넘긴 미국에 대한 경고라는 분석과 함께 북한의 대미 협상전략이 ‘핵보유국 지위 인정’으로 전환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된다.
김계관은 지난 11일 발표한 담화에서 교착 상태인 미·북 비핵화 협상과 관련해 “유엔 제재와 나라의 중핵적인 핵시설을 통째로 바꾸자고 제안했던 베트남에서와 같은 협상은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북한은 지난해 2월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에서 ‘영변 핵시설 폐기’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해제를 맞바꾸려 했지만, 미국이 ‘영변+α’를 요구하면서 결렬됐다.
김계관은 이어 “이제 우리가 미국에 속아 지난 시기처럼 시간을 버리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며 “일방적인 강요나 당하는 그런 회담에 다시 나갈 필요가 없고 협상장에서 장사꾼들처럼 무엇과 무엇을 바꿈질할 의욕도 전혀 없다”고 했다.
김계관 명의로 나온 담화는 교착 상태에 빠진 미·북 비핵화 협상에 대한 북한의 불편한 심경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분석이다.<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margin:25px 0; border:1px solid #c3c3c3" />北 "미국에 속아 일방적 강요만 당해
그런 회담 다시는 안할 것"
김계관 북한 외무성 고문은 지난 11일 발표한 담화에서 “조·미(미·북) 사이에 다시 대화가 성립되려면 미국이 우리가 제시한 요구사항들을 전적으로 수긍해야만 가능하다”며 “하지만 우리는 미국이 그렇게 할 준비가 돼 있지 않고 또 그렇게 할 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비판했다.
북한은 작년 10월 미·북 간 ‘스톡홀름 협상’이 성과 없이 결렬된 이후 미국을 향해 비난 수위를 높여왔다. 미국에 ‘배신감’ 등을 언급하며 협상 지연의 책임을 전가했다. 지난달 3일에는 이태성 외무성 부상의 입을 통해 “‘크리스마스 선물’을 무엇으로 할지는 전적으로 미국에 달렸다”고 엄포를 놓은 뒤 동창리 미사일시험장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용으로 추정되는 로켓엔진 연소시험을 했다.
2년 가까이 ‘밀당’만 하는 미·북
미국과 북한은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미·북 정상회담 이후 비핵화 협상을 진행해왔다. 하지만 비핵화 조치 이행이 먼저냐, 아니면 제재완화가 먼저냐를 놓고 양측 간 의견이 엇갈리면서 협상은 2년 가까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북한은 그동안 비핵화와 관련해 단계별 협상을 주장해왔다. 비핵화 과정을 여러 단계로 쪼개 하나를 포기하면 하나를 보상받는 방식이다. 핵무력과 미사일 기술을 완성한 만큼 한꺼번에 폐기하지 않고 단계적으로 체제 안전을 보장받겠다는 전략이다.
이에 반해 미국은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며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를 요구했다. 북한이 먼저 모든 핵무기 및 핵 관련 시설을 폐기해야 북한이 원하는 반대급부를 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북한이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한 이후 수차례의 북·미 간 협상이 결국은 북한에 핵과 미사일을 개발할 시간만 벌어줬다는 인식 때문이다.
北, ‘핵 보유국 지위 인정’ 노리나
이 같은 입장차로 미·북 협상이 지지부진하고 시간만 흐르면서 북한의 조급함이 나타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체제 보장과 제재완화 레버리지로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인 핵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방안을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과 교수는 “북한이 공식적으로 핵을 포기했다고 말한 적이 없기 때문에 언제든지 핵을 전략화해 대미, 대남 압박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 테이블을 떠나 핵보유국 인정을 요구하며 강도 높은 도발에 나설 것이란 전망이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결론이 안 나는 비핵화 협상보다 한 단계 더 전략적인 우위 상황을 만들 수 있는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는 쪽으로 미국과의 협상 전략 틀을 수정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다만 아직 미·북 실무협상의 파국을 점치기에는 이르다는 지적도 있다. 김계관은 이날 담화에서 미·북 간 물밑 대화채널을 암시하는 ‘특별한 연락통로’를 언급했다. 미·북 어느 한쪽의 태도 변화로 언제든지 극적 반전이 가능할 것이란 관측도 있다.
‘통미봉남’ 기조 당분간 지속될 듯
미·북 간의 신경전 속에 한국의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북한의 의도적인 ‘통미봉남(通美封南: 한국을 배제한 채 미국과 협상)’ 전략은 더욱 노골화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를 통한 대북제재 완화 시도가 실효성이 없다는 판단을 한 만큼 남북대화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7일 신년사에서 ‘비핵화’를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김정은 답방을 위한 여건을 조성하려고 ‘독자노선’을 강조했지만 북측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하다.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별보좌관은 최근 “미·북 간 대화 돌파구가 마련되지 못하면 한국이 독자 행동에 나설 필요도 제기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익명을 요구한 외교 전문가는 “북한에 실질적인 혜택을 주지 않는 한 북한이 우리 정부 움직임에 응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안보 전문가들도 정부의 섣부른 독자 제재 완화가 대북 제재 기조의 이탈을 불러와 북핵 용인이라는 최악의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정호/임락근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