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림동은 반세기 전 서울의 모습이 남아 있는 곳이다. 서울 도심의 마지막 달동네 ‘중림로5길’에는 1950년대 지어진 낡은 집이 그대로 있다.
새벽마다 장이 열리는 중림 어(魚)시장은 1970년대 이전만 해도 서울에서 가장 붐비는 수산물시장으로 이름을 알렸다. 지금도 수십 년째 생선과 해산물이 길거리에 깔린다.
오랫동안 과거에 머물러 있던 중림동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 2017년 봄 서울역 고가가 ‘서울로7017’로 탈바꿈한 이후 해마다 동네의 모습이 바뀐다. “남대문시장과 회현동에서 시작되는 고가 보행로가 사람들의 발길을 중림동과 만리동으로 쉽게 이어준 덕분”이라고 상인들은 말한다.
동네로 유입되는 사람들이 늘면서 맛집 등 ‘핫플레이스’들이 골목마다 등장했다. 독특한 콘셉트의 식당과 카페엔 주중에도 젊은이들이 붐빈다. 양식당 서울부띠끄, 퓨전레스토랑 베리스트릿키친 등이 대표적이다. 설렁탕집 중림장, 닭꼬치 가게인 호수집 등 노포(老鋪)들은 전국적인 맛집으로 떠올랐다. 근대 서울의 모습과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핫플레이스’가 공존하는 곳. 중림동이 서울 도심 명소의 하나로 거듭나고 있다.<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margin:25px 0; border:1px solid #c3c3c3" />
현재와 과거가 공존…'반전 매력' 중림동
2017년 5월 서울역 고가도로가 보행로인 ‘서울로7017’로 탈바꿈해 새로 개통됐다. 명동부터 중림동, 만리동까지 걸어갈 수 있는 새 길이 열렸다. 그전까지만 해도 두 지역을 오가려면 8차로 남대문로를 가로질러야 했다. 횡단보도도 4~5개를 건너야 중림동과 만리동에 닿을 수 있었다.
서울로 손잡고 食食하게 성장한 중림동…2030 놀이터로 뜨다
서울로7017 개통으로 사람들이 두 지역을 쉽게 넘나들자 중림동과 만리동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중리단길’로 불리기도 하는 중림로가 먼저 변했다. 허름한 식당만 있던 대로변에 프랜차이즈 식당이 속속 들어섰다. 거리엔 활기가 돌았다.
고가 보행로는 남산을 찾았던 시민과 외국인 관광객까지 중림동과 만리동으로 끌어들였다. 유동인구가 점점 늘어났다. 골목마다 변화가 나타났다. 20~30대 ‘젊은 사장님들’이 요리하는 식당도 속속 생겨났다.
‘젊은 사장들’ 유입…동네가 달라진다
중림동과 만리동에서 요즘 가장 크게 달라지고 있는 지역은 서울로7017과 서부역 교차로가 맞닿은 곳이다. 고가 보행로를 내려오면 만나는 넓은 광장은 화물차량 등이 즐비하던 공동 차고지를 3년 전부터 개조해 조성했다. 이곳이 ‘만리광장’으로 탈바꿈한 뒤 주말마다 야외 패션쇼, 플리마켓 등이 열린다.
이 지역 맛집 지도를 바꾸고 있는 주인공은 패션, 브랜드 디자이너들이다.
서울로7017에서 중림동 방면으로 내려와 왼쪽으로 3분 정도 걸으면 나오는 ‘베리 스트릿 키친’이 대표적이다. 아모레퍼시픽과 현대카드 등에서 일했던 오준식 디자이너가 문을 연 가게다. 오 디자이너는 브랜드디자인 기업 베리준오의 대표로 서울로7017 로고를 디자인한 사람이다. 베리 스트릿 키친은 1910년대부터 병원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리모델링했다. 식당 내부에 1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둥근 식탁을 뒀다. 손님들이 서로 어울릴 수 있도록 했다. 메뉴도 독특하다. 타이베이 삼겹살찜(1만5000원) 등 세계 길거리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만리동 도로변 끝자락에 있는 카페 ‘더하우스1932’는 건물 자체가 역사다. 일제 강점기 때 사용하던 적산가옥을 개조했다. 성민제 아주대 경영대학 교수가 운영한다. 방송국 미술감독 출신인 박수남 상상도가 대표가 내부 디자인을 맡았다.
카페 ‘현상소’도 중림동의 핫플레이스다. 이태원에서 ‘야채가게’란 이름의 비스트로를 운영하는 홍용기 대표가 서미원 디자이너, 황현식 셰프 등과 함께 문을 열었다. 과거에 영화 필름 현상소가 있었던 장소다.
외부인들에게 만리동을 적극 알리는 젊은이도 있다. 더하우스1932 아래편에 ‘종종서울’과 만리동 도로변에서 ‘오헤어22’란 바를 운영하는 이종화 대표다. 이 대표는 서울 도시 골목길을 투어하는 커뮤니티 동호회 ‘라이프쉐어 다이빙클럽’에서 만리동 골목길 가이드로 활동하고 있다.
역사적인 공간도 많아
끊임없이 변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동네를 꿋꿋하게 지키는 역사적인 공간도 적지 않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약현성당은 중림동의 터줏대감이다. 명동성당보다 6년 빠른 1892년에 지어졌으니 무려 128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국내 최초의 서양식 벽돌 건축물로 사적 제252호로 등록돼 있다. 약현성당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한 뒤 더 유명해졌다. 천주교 신자들의 결혼식 장소로 인기가 높다. 영화 ‘약속’, 드라마 ‘열혈사제’ 등의 촬영 장소로도 유명하다.
약현성당에 올라 내려다보면 서소문역사공원 한쪽이 눈에 들어온다. 서울역과 충정로역 사이 서소문 밖 네거리는 한국 천주교 역사상 가장 많은 순교자가 나온 성지다.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인박해 등을 거치며 수많은 사람이 처형당한 가슴 아픈 역사의 공간이다.
지난해 이곳엔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대한민국 종교 박물관의 새 역사를 썼다는 평을 듣는 곳이다. 지하 4층에서 지상 1층까지 총 5개 층으로, 천주교 순교자의 추모 공간이면서 동시에 현대미술 작품이 들어선 전시 공간이 됐다.
명동성당부터 서소문역사공원, 절두산 순교성지와 가회동 성당까지 천주교 사적지와 순교 성지를 잇는 약 27㎞의 길은 아시아 최초로 로마 교황청의 공식 순례지로 선포되기도 했다.
안효주/오현우 기자 j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