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라스베이거스를 점령했다. 세계 161개국, 4500여 개사가 참가한 가운데 7일 막이 오르는 세계 최대 전자쇼 ‘CES 2020’은 AI 전쟁터다. 올해 CES의 슬로건은 ‘AI in everyday life(일상 속으로 들어온 AI)’다.
구글 아마존 애플 삼성전자 등 글로벌 정보통신기술(ICT)업체들은 올해 CES에서 AI 시대의 게임 체인저를 자처하고 나섰다. 가전제품은 물론 자율주행자동차, 협업 로봇, 드론부터 의료·바이오, 군사·안보까지 AI가 모든 산업의 판을 뒤바꾸고 있어서다. AI는 무궁무진한 확장성 덕분에 ‘시대의 만능키’가 됐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지난해 7월 문재인 대통령과 만나 앞으로 한국이 집중해야 할 분야는 “첫째도 AI, 둘째도 AI, 셋째도 AI”라고 조언한 이유다.
TV 냉장고 세탁기 청소기 등은 AI를 만나 갈수록 똑똑해지고 있다. 자동차는 운전자의 기분까지 살핀다. 보쉬는 이번 CES에서 AI와 카메라 기술을 결합해 운전자의 눈꺼풀이 내려가거나 행동이 산만해지면 즉각 자율주행으로 전환하는 모니터링 시스템을 들고 나왔다.
세계 주요국과 기업들이 AI 패권 경쟁에 나섰지만, 한국의 현실은 암울하다. 기업가적 창의력과 혁신을 말살하는 풍토 탓이다. 미국 아마존의 무인점포(아마존 고)와 드론을 통한 빌딩 관리(중국)는 한국에선 모두 불법이다. 우버, 그랩 등 차량공유업체의 서비스는 해외 각국에서 더 이상 혁신이 아니라 일상이 됐지만, 한국에선 기초적인 타다 서비스마저 불법 딱지가 붙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2017년 한국의 카풀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럭시와 손잡고 신사업을 추진하려다 택시업계의 반발로 포기하기도 했다.<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margin:25px 0; border:1px solid #c3c3c3" />'게임의 룰' 사라진 AI시대, 기회에 올라타라
한국 기업의 손발이 규제에 묶여 있는 동안 거대 글로벌 기업들은 영역을 파괴하는 포식자가 됐다. 미래 유망 분야인 모빌리티(이동수단) 생태계도 빠르게 장악할 기세다. 구글은 2018년 11월 미국에서 자율주행 택시 서비스에 나섰다. 아마존은 미국 전기차업체 리비안에 7억달러(약 7900억원)를 투자했다. 소프트뱅크는 도요타와 손잡고 모빌리티업체 모네테크놀로지를 설립했다. 중국 최대 인터넷 포털 바이두는 최근 베이징에서 승객을 태운 채 자율주행차를 운행할 수 있는 면허를 취득했다.
구글, 아마존은 CES의 터줏대감 삼성전자, LG전자와도 자존심 대결을 벌였다. CES 메인 무대인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LVCC) 근처에 전시장을 차린 구글(사진)은 AI 음성서비스 구글어시스턴트를 활용해 디바이스 간 연결을 다양하게 시연했다. 아마존은 라스베이거스 테크웨스트 전시관에 있는 샌즈엑스포 2층에 4개 관을 빌려 AI로 움직이는 각종 디바이스를 선보였다.
AI 시대는 콘텐츠와 데이터의 시대다.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웨어가 각광받는다. 콘텐츠의 잠재력을 감안하면 ‘스토리 왕국’ 월트 디즈니가 애플 못지않게 커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디즈니는 영화 스트리밍 서비스(OTT)시장에 진출해 넷플릭스 시장을 잠식 중이다. 아마존의 프라임 비디오와 애플TV도 경쟁에 가세해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다.
AI 생태계를 구성하는 3대 요소는 알고리즘, 데이터, 플랫폼이다. 이 가운데 데이터가 가장 중요하다. 데이터 없이는 알고리즘도, 플랫폼도 무용지물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데이터 활용 자체가 안된다. ‘데이터 3법’(개인정보보호법·정보통신망법·신용정보법 개정안)은 결국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AI 시대 ‘게임의 룰’은 과거와 확연히 다르다. 전선(영역)의 구분이 없고, 피아(彼我)식별도 어려운 무한경쟁 세상이다. 경쟁자가 불쑥 등장하고, 한번 밀리면 만회하기 힘들다. 초연결·초경쟁 시대엔 국가와 기업이 함께 뛸 수밖에 없다. 여기서 뒤처지면 기업은 물론 국가 생존 자체가 위태로워진다.
라스베이거스=이건호 산업부장 leek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