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의 강대강 대치가 지속되며 중동 지역에서 점차 전운이 돌고 있다. 미국과 이란은 물론, 동맹국 사이에도 충돌이 빚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다.
5일(현지시간) 이란이 핵합의 탈퇴를 발표했다. 국회의원은 백악관에 대한 직접 공격을, 장성은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언급하며 미국과의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각오를 비치고 있다.
미국의 뿌리깊은 불신에서 시작된 이란과의 갈등은 지난달 미군 기지가 공격받은 사건을 계기로 군사적 충돌로 비화됐다. 지난달 27일 이라크 키르쿠크 미군 주둔 기지가 로켓포 공격을 받아 미국인 1명이 숨졌다. 미국은 로켓포 공격의 배후로 이라크 시아파 민병대와 이란혁명수비대를 지목하고 이들 군사시설 5곳을 전투기로 폭격했다.
미군의 폭격으로 25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다치자 시아파 민병대와 추종세력들은 지난달 31일과 1일에 거쳐 이라크 바그다드에 위치한 미국 대사관을 습격했다. 이들은 "미국에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외치고 성조기를 불태웠다. 시위대 수십명은 미국 대사관 문을 부수고 들어가 불을 질렀고 대사관은 최루탄 등을 이용해 저지에 나섰다.
사상 초유의 바그다드 미 대사관 습격에 대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란은 미국 민간인을 죽였고 우리는 강력하게 대응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며 "이란은 이라크의 미 대사관 공격을 조종했으며 그들은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군은 지난 3일 밤 이라크 바그다드 국제공항에 드론 폭격을 감행해 이란 군부 거물인 거셈 솔레이마니 쿠드스군(이란혁명수비대 정예군) 사령관과 시아파 민병대 하시드알사비(PMF)의 아부 마흐디 알무한디스 부사령관을 사살했다. 미국의 조치에 이랑과 이라크 모두 반발했다. 이란은 국가적 차원의 보복을 다짐하고 나섰고 이라크 의회는 주둔 미군 철수 결의안을 가결했다. 적대관계에 있던 이란이 실제 행동에 나설 준비를 하고, 미국과 이란 사이에서 침묵을 지키던 이라크가 친(親)이란으로 돌아서게 만든 셈이다.
이란은 5일 "이란은 핵합의에서 정한 우라늄 농축 능력과 농도 제한을 지키지 않겠다"며 핵합의(JCPOA.포괄적공동행동계획) 탈퇴도 선언했다. 예고된 수순이었지만 시기가 나빠 정세를 악화시켰다는 평가다. 앞서 주요 6개국(유엔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독일)과 이란이 지난 2015년 7월 타결한 핵합의에는 이란의 핵무장을 막는 대신 경제 제재를 해제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란의 핵합의 이행에도 미국은 2018년 핵합의에서 탈퇴하고 이란 최고지도자와 정규 군사조직인 혁명수비대, 중앙은행을 제재 대상에 올렸다. 이란 위협을 위해 걸프 해역에 항공모함 편대도 배치했다. 이란의 핵무장 의심을 거두지 못한 탓이다. 이에 더해 유럽마저 경제 제재를 풀지 않으며 이란은 지난해 5월부터 단계적으로 핵합의 이행 수준을 축소했다.
미국의 의심과 제재가 이란을 핵무장에 한 걸음 다가서도록 만든 셈인데, 전문가들은 이란이 핵무장에 나설 경우 1년에서 1년 반 사이 전력화가 가능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미 사거리 2000km대 탄도미사일도 보유한 만큼 중동과 서유럽까지가 공격 가능한 범위에 들어간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란은 솔레이마니 사령관 피살과 관련해 미국에 '가혹한 보복'을 하겠다고 나섰다. 호세인 데흐건 이란 최고지도자 군사 수석보좌관은 "전쟁을 시작한 것은 미국"이라며 군사적 대응을 예고했다. 아볼파즐 아부토라비 이란 국회의원은 "이란은 미국 백악관을 직접 공격할 능력을 갖췄다"며 "적절한 시점에 미국의 공격에 응답할 준비가 돼 있다"고 주장했다.
이란의 반발에 트럼프 대통령도 기름을 끼얹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이란이 보복에 나서면 이란 내 52개 지역을 공격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란이 미국인이나 미국 자산을 공격할 경우 이란 내 52개 지역을 겨냥할 것"이라며 "그중 일부는 이란과 이란 문화에 매우 중요한 곳이다. 매우 신속하고 심한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문화 유적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됐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후예인 이란은 문화 강국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국가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도 이집트보다 많은 24곳을 보유했다.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무장관은 "트럼프는 솔레이마니 장군을 죽여 이미 국제법을 심대하게 위반하더니 이제는 문화 유적을 표적으로 삼았다. 이는 전쟁범죄"라고 비판했다. 이란 외무부는 미국 이익대표부 역할을 하는 주테헤란 스위스 대사관의 대사대리를 초치했다. 1954년 헤이그 협약에 따라 문화 유적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 것은 전쟁 범죄에 해당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논란을 일으키자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진화에 나섰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폭스뉴스 선데이'와 인터뷰에서 "그가 말한 것을 아주 자세히 읽어보라"며 문화 유적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는 말을 하진 않았다고 해명했다. ABC 방송 '디스 위크' 인터뷰에서도 "공격하는 모든 대상은 합법적인 목표이며, 미국을 방어하고 보호하는 단 하나의 임무를 위해 정해진 목표"라고 강조했다.
다만 이란과의 갈등은 더욱 고조됐다. 이란은 미국이 52곳에 대한 재보복에 나선다면 이스라엘을 직접 공격하겠다고 선언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백인과 유대인 중심의 지지기반을 가진 것을 노린 조치다.
이란 혁명수비대 장성이자 헌법기관인 국정조정위원회 사무총장인 레자에이는 5일(현지시간) 트위터를 통해 "만약 미국이 이란의 군사적 대응에 어떠한 반격을 한다면 이스라엘 하이파와 텔아비브는 가루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이파는 무역·휴양·상공업 중심지인 이스라엘의 3대 도시이고 텔아비브는 국제법상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2대 도시다. 레자에이는 "이란은 이스라엘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도록 하는 방식으로 하이파와 이스라엘의 중심지들을 가루로 만들어버리겠다"고 강조했다.
중동 국가들은 아직 침묵을 지키고 있다. 종교적으로 분열된 지역 특성 탓에 섣불리 이란을 자극하면 상황이 더 복잡해질 것을 우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은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이라크 등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이란은 시리아와 가자 지구의 무장 세력,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예멘 등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구축했다. 이들 국가 사이에 군사적 충돌이 빚어질 경우 중동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빠질 우려가 있다.
한국도 이번 사태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란이 미국에 대한 보복 조치로 호르무즈해협 무력봉쇄 가능성을 시사한 가운데 미국도 한국에 호르무즈해협으로 파병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호르무즈해협은 걸프만의 주요 원유 수송경로인 이란의 해역이다. 미국은 해적 소탕을 명분으로 파병을 요청했지만, 파병이 이뤄질 경우 사실상 이란과의 군사적 충돌로 비화될 우려가 높다. 만약 호르무즈해협이 실제 봉쇄될 경우에도 중동산 원유 수입로가 막히는 결과를 낳는다. 정부는 오늘 관계부처 회의를 열고 이 문제를 논의한다.
다음은 미국-이란 갈등 주요 일지
▲2018년 5월 = 트럼프 행정부, 이란 핵합의 탈퇴 제재 부활 예고
▲2018년 8월 = 달러화, 귀금속, 자동차 등 1차 제재 부활
▲2018년 11월 = 원유, 조선, 항공 등 2차 제재 부활
▲2018년 12월 = 이란 '원유 길목' 호르무즈해협 봉쇄 경고, 미국은 항모 배치 예고
▲2019년 1월 = 이란 최고지도자 하메네이, 미국 원색적 비난
▲2019년 2월 = 이란, 신형 장거리 순항미사일 공개
▲2019년 3월 = 미국, 이란 핵과학자와 관료 등 개인 14명, 기관 17개 제재 대상 지정
▲2019년 4월 = 미국, 이란 정예군 혁명수비대를 외국테러조직으로 지정
▲2019년 5월 = 미국, 이란산 원유 제재 관련 한시적 제재 예외 조치 종료
▲2019년 5월 = 이란, 핵합의 의무이행 일부 중단 선언
▲2019년 5월 = 미국, 철강 등 광물 분야 제재 행정명령 즉각 발령 & 미 항공모함 및 전략폭격기 중동 배치
▲2019년 5월 = 호르무즈해협서 상선 4척 피습
▲2019년 6월 = 이란, 오만해서 미군 무인기 격추. 트럼프, 미군 보복공격 실행 직전 중단
▲2019년 7월 = 미국, 우리나라에 호르무즈 해협 파병 요청
▲2020년 1월 = 미국,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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