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우리 경제는 3년 연속으로 무역 1조달러를 달성했고, 봉준호 감독은 한국인 최초로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습니다.”
행정부 장관들의 한 해 결산 소감 같지만 유남석 헌법재판소 소장 신년사의 한 대목이다. 유 소장은 지난 1일 신년사를 통해 “지난해 우리는 국내외의 여러 정치·경제 상황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 각자의 견해차에서 비롯된 사회적 갈등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면서도 우리가 일궈온 성과를 거론했다.
고난의 한 해를 보낸 국민에게 위안거리와 희망적 메시지를 전해주겠다는 뜻을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생활고를 호소하는 사람이 늘어가고, 사회적 갈등이 격화되는 시기에 전하는 헌재 소장의 발언으로는 한가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유 소장의 덕담은 무역 1조달러와 황금종려상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작년의 성과는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올해의 희망이 될 것”이라거나 “우리 국민 모두가 공통의 희망과 목표를 향해 한마음으로 나아간다면 2020년은 통합과 성취의 한 해로 기억되리라 믿는다”는 등의 말로 신년사를 채웠다. 신년사 전체 962글자 가운데 658글자가 ‘열심히 하면 잘될 거다’라는 투의 뜬구름 잡는 희망론이었다. “새해를 맞이하는 오늘의 각오를 올 한 해 동안 하루하루 이어간다면, 환경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면서 양극화나 저출산 등과 같은 어려움을 극복하는 역사도 함께 써 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는 문장에서는 치열함을 찾기 어렵다.
헌재는 앞으로 소득주도성장의 양대 축인 최저임금과 군대 내 동성애 처벌, 자율형사립고의 일반고 일괄 전환, 12·16 부동산 대책 등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어느 쪽으로 결정하더라도 여론의 극한 충돌을 불러올 수 있는 사건들이다. 유 소장은 지난해 수출액이 전년보다 10% 이상 줄어든 가운데 겨우 턱걸이로 1조달러를 넘어선 무역 규모를 언급하기보다 지금의 현실을 얼마나 엄중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국민 통합의 길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려는지 소상히 밝히는 게 더 좋았다는 생각이다. 내년 신년사에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덕담보다 오로지 헌재 소장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려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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