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미국과 유럽연합(EU) 간 무역 갈등이 본격화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수출로 먹고 사는 우리나라의 교역 환경도 순탄치 않을 겁니다.”
통상 전문가인 박태호 법무법인(유) 광장 국제통상연구원장은 지난 3일 서울 중구 광장 사무실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갖고 이렇게 말했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출신인 박 원장은 노무현 정부에서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 무역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이명박 정부 땐 통상교섭본부장을 맡았다.
▶작년 세계 무역이 뒷걸음질 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촉발한 보호무역주의가 한 몫 했다는 분석이 많다. 올해 세계 교역 흐름에 대해 어떻게 전망하나.
“세계경제 전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국제기구는 올해 세계 경제가 작년보다 다소 나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미·중 무역분쟁 지속 가능성, 중국 성장 둔화, 영국과 EU의 브렉시트 협상 난항 우려, 일부 지역의 지정학적 사태 발생 등을 감안해 확신하기 어렵다. 여러 가능성이 현실화하면 글로벌 소비 및 투자가 둔화하면서 세계무역도 위축될 수 있어서다. 올해 세계 무역은 작년보다는 낫겠지만 완연한 회복을 기대해선 안된다.”
▶주목할 만한 국제 통상 이슈가 있다면.
“역시 미·중 통상분쟁의 전개 과정이다. 1단계 합의에 대한 서명을 앞두고 있지만 실제 이행 과정에서 분쟁이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 미국의 반(反) 화웨이 움직임이 중국 정부의 보조금 정책 및 국영기업으로 확대되면 분쟁이 커질 것이다. 올해 11월엔 미국 대통령 선거가 예정돼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정책을 지속하고 미국 중심의 디지털무역 관련 신통상 규범도 이행하려고 할 것이다. EU도 새 집행부가 구성돼 강경한 통상 정책을 구사할 가능성이 높다. 미·EU 간 통상 분쟁이 확대될 수 있다. 오는 6월 카자흐스탄에서 제12차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열릴 예정인데 여기에 큰 기대를 할 순 없다. 이밖에 브렉시트 협상, 미·일 무역협정 이행, 미·멕시코·캐나다 무역협정(USMCA) 이행 등도 큰 이슈가 될 것이다.”
▶자유무역을 지향하면서 1995년 출범한 WTO가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배경과 전망에 대한 견해는.
“WTO 내 상소기구에 불만을 갖고 있던 미국이 2016년 5월 이후 신임 위원의 선임 절차를 거부하면서 WTO 기능이 마비됐다. 상소기구는 분쟁 당사국 간 분쟁해결의 최종심을 담당하는 곳이다. 직접적인 이유는 상소기구의 책임 및 권한을 넘어서는 위원들 결정에 따라 미국이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한 회원국이라도 반대하면 아무런 합의를 이룰 수 없는 WTO의 의사결정 방식이다. 과거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 체제에선 미국 중심의 선진국들이 의사 결정을 주도했다. 개발도상국들은 힘이 약해 크게 반대하기 어려웠다. 지금은 중국 인도 브라질 등 거대 개도국들의 경제력이 커지며서 선진국들과 사사건건 대립해왔다. 미국은 WTO 중심의 다자무역체제에선 기대할 게 없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WTO 내부의 획기적인 개혁이 없는 한 이런 상태는 지속될 것이다.”
▶오는 11월로 예정된 미국 대통령 선거가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주의 및 세계 보호무역주의 흐름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나.
“트럼프 대통령의 최상의 목표는 재선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우선주의’를 더욱 강화할 것이다. 중국과의 통상 분쟁을 더 밀어붙이고 통상법 232조 및 301조 등의 활용도 적극 검토할 가능성이 높다. 예컨대 자동차에 이어 반도체에도 232조를 적용하거나 중국과 프랑스, 나아가 EU에 대해 전반적인 불공정 무역 관행을 조사하는 301조를 적용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교역 상대국과 분쟁이 발생하면 보복 조치를 취할 것이다. 그럼 글로벌 보호무역주의가 확산하고 세계경제의 불확실성도 커질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에 이어 EU와의 무역 전쟁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일각에서 제기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양자 FTA를 선호한다. EU와도 개별 FTA를 맺고 싶어한다. 협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자동차 및 차 부품에 대해 232조를 적용한 데 이어 불공정 무역 관행에 대한 301조 적용까지 검토하고 있다. 미국은 EU의 탄소국경세, 개인정보보호법, 디지털세 등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항공기 보조금 문제를 놓고 EU와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다. 이에 맞서 EU는 최근 새 집행부를 구성했다. 종전보다 강력한 통상 정책을 구사하겠다고 천명한 상태다. 특히 통상감찰관(Chief Trade Enforcement Officer) 제도를 신설하는 등 통상정책의 이행을 철저히 감독하겠다는 의지다. 미국과 EU 간 갈등은 미·중 분쟁처럼 크게 부각될 가능성이 높다.”
▶미·중 무역분쟁은 분수령을 맞고 있다. 최근 1단계 무역 합의를 이뤘는데 그 배경은.
“1단계 합의를 이룬 결정적인 배경은 양국의 경제적 피해가 커지고 있어서다. 미국 내에선 소비자들과 중소기업, 농민 등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선거를 앞둔 트럼프 대통령에겐 부담으로 작용했다. 중국 역시 수출, 투자, 소비 등이 부진해 올해 성장률이 5%대로 하락할 전망이다. 시진핑 주석으로선 대외 위험 요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판단이 섰을 것이다. 즉 양국이 정치·경제적으로 통상 갈등을 일단 봉합해야 할 동기가 충분히 있었다. 대통령 선거 이후엔 미·중 갈등이 더욱 커질 수 있다. 다만 한국에 미치는 영향은 상대적으로 작을 것이다. 그동안의 ‘학습 효과’ 때문이다. 우리 입장에서 아주 큰 새 리스크는 아니다.”
▶미국과 중국 간 무역 협상이 어떻게 전개될 것으로 보나.
“양국 갈등의 핵심은 중국 정부의 보조금과 국영기업 문제다. 중국 국가체제와 직결된 이슈여서 1단계 합의에 그쳤을 것이다. 미국으로선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어 1단계 합의엔 보조금 문제 등을 포함하지 않았다. 보조금과 국영기업 문제는 미국의 반(反) 화웨이 정책과 직결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화웨이가 중국 정부에서 750억 달러 상당의 보조금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앞으로 미국은 이 문제를 집요하게 제기할 것이다. 중국 역시 완강히 저항할 수밖에 없어 2단계 합의는 쉽지 않다. 이 문제는 글로벌 통상규범 차원에서 다룰 필요가 있다. 미국이 EU 일본 캐나다 한국 멕시코 호주 등 자본주의 체제를 택하고 있는 국가들과 공동 대응하는 게 바람직하다.”
▶미국과 중국이 사사건건 갈등을 빚고 있는 근본적이 이유가 있다면.
“미국과 EU는 10여 년 전부터 중국이 더 성장하기 전에 무역자유화 및 새 통상규범을 수용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해왔다. WTO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자 미국과 EU는 각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및 범대서양무역투자동반자협정(TTIP)을 추진해 중국에 압력을 가한다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이 TPP에 불참하고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로 인해 TTIP마저 무산되자 중국을 압박할 수단이 사라졌다. 중국이 2015년 발표한 ‘중국 제조 2025’(Made in China 2025) 전략은 기름을 끼얹은 꼴이다. 중국이 첨단기술 분야에서도 미국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이제 통상뿐만 아니라 안보 환율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고 나설 것이다. 미국과 중국 간 ‘패권 전쟁’이 시작됐다.”
▶미·중 간 통상 관계가 중·장기적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으로 보나.
“미국과 중국이 1단계 합의에 공식 서명한 뒤 미국은 합의 이행에 관심을 집중할 것이다. 중국도 미국이 약속한 관세 철회 등을 지켜볼 것이다. 미국은 중국이 과거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고 보고 있다.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으면 즉각 관세를 부과하는 ‘스냅백’(snapback) 조항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향후 미·중 간 2단계 합의는 난항이 예상된다. 중국 보조금 및 국영기업 등 본질적인 이슈들을 다룰 것으로 보여서다. 미국은 추가로 첨단기술, 환율, 안보, 군사, 국제인프라 프로젝트 등 다양한 분야에서 문제 제기를 계속 할 전망이다. 중국의 일대일로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이 정면 충돌할 가능성도 있다. 역사적으로 글로벌 패권 전쟁은 수십 년 간 지속했다. 미국과 중국 간 갈등은 이제 시작 단계다. 트럼프 행정부 이후 민주당이 집권해도 마찬가지다.”
▶올해 선거에서 미국 행정부가 교체되면 미·중 관계 전망은.
“만에 하나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한다고 해도 미·중 관계가 호전될 것 같지 않다. 전임자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중국을 견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민주당 후보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중국의 불공정한 무역정책과 관행을 지적하고 시정하려는 노력을 지속할 것이다. 다만 중국을 압박하는 방식은 트럼프 대통령과 다를 것으로 예상한다. WTO와 같은 다자무역 체제를 활용하는 한편 TPP에 복귀해 중국의 정책 및 관행의 시정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수입산 자동차에 대해 무역확장법 232조 적용을 검토했으나 최종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이 232조를 근거로 자동차와 차 부품에 대해 25%의 고율 관세를 추가 부과하면 자국에도 미치는 파장이 매우 클 것이다. 자동차 소비자들에겐 직격탄이 될 수 있어서다. 미국에선 이미 중국에서 수입한 상품 가격이 크게 올라 소비자들이 불만을 갖고 있다. 자동차 및 부품에 추가 관세를 부과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또 멕시코 및 캐나다와 USMCA를 통해 자동차 및 부품 문제를 해결했다. 일본과는 양자 협정을 맺었다. 한국과도 FTA를 수정했다. 실질적으로 미국이 압력을 가할 대상으로는 EU만 남아있다. 미국은 최근 들어 탄소국경세, 개인정보보호법, 디지털세, 항공기 보조금 등 여러 분야에서 EU와 갈등을 빚고 있다. 미국은 232조를 통해 EU에 자동차 및 부품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여러 분야를 한꺼번에 묶어 통상법 301조를 적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할 것 같다. 이런 이유로 미국이 자동차에 대해 232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고 본다.”
▶미국이 한국에 대해 자동차 232조나 슈퍼 301조를 발동할 가능성이 있나.
“슈퍼 301조 적용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다만 자동차 232조의 경우 완전히 종료된 이슈가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언제 어떤 결정을 내릴 지 모른다. 다만 미국은 한국과의 FTA 개정 협상에서 자동차 분야에서 상당히 얻어냈다. 한국이 미국 안전기준을 인정하는 수입차 수를 대폭 늘렸고, 픽업트럭 관세율(25%)을 2041년까지 유지한다는 데 합의했다. 작년 한국의 대미 무역수지 흑자 폭도 100억 달러 정도로 줄었다. 이런 이유로 미국이 한국을 상대로 자동차 232조 조치를 취할 가능성은 낮다. 올해 주요 대상은 EU다. 미·EU 무역 협상 때 미국이 232조를 압박카드로 사용할 것이다.”
▶미국은 한국의 주요 교역 상대국이다. 자동차 외에 관심있게 지켜봐야 할 산업 분야가 있다면.
“미국이 무역확장법 232조를 적용하려는 분야는 알루미늄 철강 외에도 자동차 반도체 선박 등이 있었다. 우리의 주요 수출품인 반도체 동향을 잘 살펴야 한다. 철강산업 움직임도 중요하다. 우리 철강업계는 쿼터제 때문에 대미 수출을 축소해야 한다. 올해는 철강 쿼터의 예외 품목을 적극 발굴할 필요가 있다. 다만 미국이 한국산 자동차나 반도체에 대해 관세율을 높이는 조치를 취할 가능성은 매운 낮은 게 사실이다. 자동차 232조의 경우 EU 협상 때의 협상 카드였다. 이걸 사용하려면 작년 5월에 꺼냈어야 했다. 그런데 작년 11월로 늦췄고 지금까지 미루고 있다. 232조를 발동하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우리 기업들은 올해 1월부터 미·일 무역협정이 발효됐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시장에서 한국 상품이 FTA로 누려온 혜택을 일본 제품 역시 똑같이 받게 됐다는 의미다. 미국에서 우리 상품의 상대적 우위가 사라지게 됐다. 미국에선 일본에 대적할 수 있는 새로운 경쟁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올해 미국 대선이 예정돼 있는 만큼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보호해주려는 산업이 무엇인지 살필 필요가 있다. 이미 경험했듯 세탁기와 태양광 패널 등처럼 노동집약적 산업이 대상이 될 것 같다.”
▶한국은 미국을 달래기 위해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 수입을 대폭 확대하기로 했다. 미국산 무기 수입도 늘릴 방침이다. 또 어떤 전략이 필요할까.
“양국 간 무역수지를 인위적으로 조정하는 건 경제적 비효율을 초래하는 조치다. 하지만 어차피 수입해야 하는 상품이고, 가격 차이도 크지 않다면 미국에서 수입하는 전략은 유효하다. 대미 무역수지를 축소하는 데 기여할 수 있어서다. 이런 수입선 전환은 공기업 차원에선 가능하지만 민간기업에 강제할 수 없다는 게 문제다. 민간엔 자발적인 조치를 유도할 수 있다. 단기간에 미국에 지나치게 많은 물량을 수출하면 미국 정부의 타깃이 될 수 있다. 요즘처럼 세계무역 환경이 불확실할 때일수록 수출 증가율을 선제적으로 관리하는 게 바람직하다.”
▶작년은 ‘수출 코리아’에 어려운 해였다. 세계 교역이 위축되며 전년도에 세웠던 수출 6000억 달러 돌파의 금자탑이 무너졌다. 올해 수출 전망은.
“IMF, OECD 등 국제경제기구들은 올해 세계 경제가 작년보다는 조금 나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미국 등 선진국에 대한 전망은 부정적이다. 세계무역 역시 올해 크게 성장할 것 같지 않다. 신흥 개도국 위주로 세계 수입이 조금 늘어날 것이다. 우리나라 수출의 50%는 중국 미국 일본 EU로 향한다. 나머지 50%를 개도국이 차지한다. 그 중 아세안 10국이 전체 수출의 10% 이상에 달한다. 우리 수출 구조와 미·중 무역분쟁의 1단계 합의 등을 감안할 때 올해 우리 수출은 정부 예상대로 3%가량 성장할 수 있을 전망이다. 중국과 아세안으로의 수출이 주도할 것이다.”
▶한국은 FTA 모범국으로 꼽힌다. 세계 58개국과 총 18건의 FTA를 체결했다. 앞으로 역점을 둬야 할 상대국이 있다면.
“한국의 FTA 파트너 국가들의 국내총생산(GDP)을 다 합하면 세계 GDP의 75%에 육박한다. 칠레, 페루에 이어 세계 3번째로 많은 규모다. 다만 일본 중남미 아프리카 중동 러시아 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FTA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시장 다변화 차원에서 이들 국가와의 FTA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 미래 잠재력을 감안할 때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중남미 국가들과의 FTA 추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EU, 유럽자유무역연합(EFTA), 인도 등과 체결한 기존 FTA를 업그레이드 하는 것도 꼭 필요한 작업이다.”
▶2018년 말 일본 호주 등 11개국이 참여하는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동반자협정(CPTPP)이 발효됐다. 미국·멕시코·캐나다협정(USMCA)도 타결됐다. 최근에는 한·중·일 3국을 포함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협정문이 완료돼 최종 타결을 앞두고 있다. 이런 메가 FTA가 양자 FTA와 다른 점이 있다면.
“WTO 중심의 다자무역체제가 약화하면서 차선책으로 메가 FTA의 역할을 기대했던 게 사실이다. 메가 FTA는 양자 FTA에 비해 시장 규모가 크고 원산지 규정도 더 신축성이 있어 기업에 유리하다. 메가 FTA가 일단 통합 원산지 규정을 채택하면 원자재 부품을 여러 회원국에서 조달할 수 있다. 양자 FTA보다 기업 선택권이 훨씬 확대된다. 메가 FTA에서 높은 수준의 시장 개방과 새 통상규범을 채택하면 파급 효과는 양자 FTA보다 더 크다. 다른 메가 FTA나 WTO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무역 강국인 한국의 약점은 교역 대상이 미·중에 지나치게 편중돼 있다는 점이다. 무역 비중을 확대할 나라를 꼽자면.
“대중(對中) 무역의 성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92년 중국과 수교한 뒤 많은 기업들이 중국에 진출했다. 우리 기업들은 한국에서 소재·부품·장비를 중국에 들여온 뒤 중국의 값싼 노동력을 활용해 완제품을 만들었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시장으로 수출했다. 즉 중국 수출의 대부분이 우리 기업의 가공무역 때문이었다는 얘기다. 중국 내수를 직접 겨냥한 게 아니었다. 날로 커져가는 중국 시장을 고려할 때 우리 수출이 중국에 편중됐다고 단정할 수 없다. 오히려 지금부터라도 중국 내수시장을 직접 공략하는 수출품 비중을 확대할 전략을 짜야 한다. 중국 현지 시장에 직접 들어가면 수출 거래가 아니기 때문에 중국 미국 등과의 무역 분쟁을 피하는 효과도 낼 수 있다. 비슷한 논리로 빠르게 성장하는 아세안 시장 비중도 늘릴 필요가 있다. 한·인도 간 FTA가 체결됐는데도 인도와의 무역 규모는 매우 적다. 인도 비중을 확대하는 것도 과제다.”
▶한국은 CPTPP 가입을 검토해왔다. 가입에 따른 실익을 분석한다면.
“CPTPP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메가 FTA다. 시장 자유화 수준이 높고 전자상거래 등 새로운 규범도 포함됐다. 11개 회원국으로 구성돼 양자 FTA에 비해 원산지 규정이 신축적이다. 앞으로 회원국이 확대될 것이다. 태국, 대만, 영국 등은 이미 가입 의사를 표명했다. 미국이 회원국으로 가입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한국 입장에서 CPTPP 가입은 한·일 FTA를 체결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우리가 CPTPP에 가입하면 첨단기술 제품 및 자동차 분야에서 한·일 간 경쟁이 심화될 수 있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이 한국의 농산물시장 개방을 추가 요구할 수도 있다. CPTPP 가입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란 얘기다. 다만 한국은 무역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해나가야 할 나라다. 또 새로 구축되고 있는 지역 중심의 가치사슬에서 배제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로선 CPTPP에 가입하는 게 유리하다. 역내 수출 환경 변화에도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 CPTPP는 한·일 관계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완충 역할도 해줄 수 있다. 시장개방 수준이 낮은 RCEP보다 훨씬 낫다.”
▶산업통상자원부 내 통상교섭본부에 대해 평가한다면.
“2013년 외교통상부 산하 통상교섭본부가 해체된 뒤 그 기능이 산업통상자원부로 이전됐다. 이후 우리나라 통상 정책은 좌충우돌이었다. 통상 기능만 이전됐을 뿐 조직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 정부에서 통상 업무를 전담하는 통상교섭본부가 다시 만들어진 건 다행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특정 산업을 대상으로 무역제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통상 이슈가 산업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면서 산업부 내 통상교섭본부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은 다양한 경험을 축적한 정부 내 통상 전문가다. 지금처럼 글로벌 무역 환경이 불안한 상황에선 우리나라와 같은 중견 국가들이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데, 유 본부장이 이런 점을 잘 이해하고 있다. 다만 통상교섭본부장은 과거처럼 장관급으로 격상시킬 필요가 있다. 대외 위상과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서다. 또 장관급으로 격상시켜야 인사 등 측면에서 독립성 유지할 수 있다. 통상 전문가의 꿈을 키우고 싶어하는 젊은 인재도 끌어모을 수 있다.”
▶통상교섭본부를 독립시켜야 한다는 의견도 일각에서 나오는데.
“과거 통상본부는 외교부 산하였다. 지금은 산업부 산하다. 정답은 없지만 지금처럼 산업부 아래 편입돼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미국의 무역통상법 232조 적용 움직임이나 일본의 수출규제 등을 보면 더욱 그렇다. 요즘엔 국내 산업과 통상이 가까울수록 유리하다. 산업부 내 통상본부의 전문성을 인정해주면 된다. 다만 통상본부 또는 통상본부 내 일정 조직을 서울로 옮기는 방안은 꼭 검토했으면 한다. 외국 공관이나 외국계 기업들과 상시 소통해야 하는데, 통상본부가 세종시에 있다 보니 쉽지 않다. 국가 차원에선 낭비다.”
▶통상교섭본부가 올해 역점을 둬야 할 부문이 있다면.
“올해 글로벌 통상 환경은 불확실하고 유동적일 것이다. 정부는 다양한 통상 현안에 대해 사전 대비를 철저히 해 불확실성을 조금이라도 낮출 책임이 있다. 대미 무역수지 흑자 폭이 지나치게 커지지 않도록 관리하거나 미국의 반(反) 화웨이 정책에 대한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게 대표적이다. 해외에 진출한 우리 기업이 한국으로 돌아올 경우 어떤 혜택을 줄 것인지 부처 간 협업하는 것도 중요하다. 중국 일대일로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중 어느 편에 설 것인 지에 대해서도 입장을 정해야 한다. 올해 여러 국가들이 우리 상품에 대해 부당한 무역제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 WTO 제소 등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EU의 개인정보보호법 및 디지털세, 미국이 추진하는 정보의 국경이동 자유화 동향 등을 국회와 기업에 소상히 설명하는 것도 주요 과제다. 올해 초까지 RCEP 협상을 마무리하는 데도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
▶한국의 수출 상대국 1,2위가 중국과 미국이다. 우리로선 두 강대국 사이에서 입장을 정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사실이다. 중국 일대일로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이 대립하는 양상인데, 미국 전략은 아직 구체화하지 않은 상태다. 중요한 건 우리 통상교섭본부가 원칙과 논리를 세우는 일이다. 양쪽 눈치만 보는 게 결국 한계에 부닥칠 수 있어서다. 경제협력과 시장경제, 한반도 평화 등 정제된 논리를 정립한 뒤 미국과 중국을 상대로 일관성 있게 설명하고 설득해 나가야 한다.”
조재길 기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