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휘의 베트남은 지금] 정경유착 '권력'에 철퇴 내린 베트남 '세기의 재판'

입력 2020-01-03 12:51
수정 2020-01-06 09:42

2019년 12월28일 하노이에 있는 베트남 최고인민법원은 향후 베트남 미래의 가늠자가 될 만한 ‘세기의 판결’을 내렸다. 1986년 ‘도이모이’ 개혁을 통해 ‘사회주의 지향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한 이래 사실상 첫 정경유착에 대한 판결이라는 점에서다.

이번 재판에서 최고인민법원은 응우옌 박 선 전 정보통신부 장관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국영 통신사인 모비폰이 민영 페이 퍼 뷰(pay per view, 시청한 프로그램마다 요금을 지불) TV 회사인 AVG를 시세보다 약 3배 비싼 가격으로 인수하는 과정에서 권한을 남용하고, 뇌물을 수수했다는 게 선고의 이유다. 선 전 장관을 비롯해 사건에 연루된 관료들 대부분이 중형에 처해졌다. 선 전 장관의 후임으로 사건 당시 차관이었던 쯔엉 밍 뚜언 전 정통부 장관은 징역 14년을 받았다. 법원은 2명의 모비폰 전 회장들에게도 각각 23년, 14년형을 선고했다.

이에 비해 뇌물 제공자이자 베트남 재계 1위 빈그룹 팜 느엇 브엉 회장의 남동생인 팜 느엇 부 전 AVG 회장은 징역 3년형에 처해졌다. 법원은 판결 이유로 ‘그 동안 베트남 불교에 많은 공헌을 했고, 기타 사회 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모비폰의 AVG 인수 계약금(8조9000억동, 약 4500억원) 및 이번 사건을 통해 불법적으로 취득한 이익금을 전액 반환 완료하는 등 국가 예산의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다른 피고, 조직, 개인이 부 전 회장의 형벌을 낮춰 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한 것도 감형의 근거로 적시됐다. 부 전 회장이 베트남 검찰로부터 사형을 구형받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최고인민법원은 파격적인 ‘관용’을 베푼 셈이다. 국고의 손길을 야기한 부당한 정경유착엔 철퇴를 내리되, 과거에 대한 책임은 기업이 아닌 ‘권력’이 져야한다는 판결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베트남 정부와 법원은 최근 몇 년 사이 대규모 권력형 비리에 대해 엄벌을 내려왔다. 2017년이 기점이다. 그 해 8월과 10월에 각각 산업무역부 차관과 다낭시 당 서기장이 부정부패 혐의로 전격 해임됐다. 2018년 1월 최고인법원은 찐 쑤언 타인 전 페트로베트남건설 회장에게 국가에 1000억원대의 손실을 끼친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하기도 했다. 타인 전 회장은 페트로베트남(석유가스공사)의 자회사이던 오션뱅크의 부당대출을 종용해 결과적으로 오션뱅크 부실을 초래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2018년 3월엔 딘 라 탕 전 공산당 정치국원 겸 호찌민시 당 서기장에게 징역 18년과 벌금 6천억동(약 300억원)이 선고됐다. 페트로베트남 회장 시절에 부실한 오션뱅크에 투자해 회사에 약 400억원의 손실을 입혔다는 게 죄목이었다.

‘모비폰-AVG’ 사건도 기본적으론 관료와 국영기업 경영진이 사익을 위해 국고를 축 낸 점에선 동일하지만, 민간 재벌이 관여됐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정경유착에 관한 최초 판결이라는 얘기다. 빈그룹은 아파트, 쇼핑몰 등 부동산 개발로 빠르게 부를 축적해 베트남 재계 1위에 올라선 기업이다. 최근엔 재계 2위인 마산그룹에 빈마트 등 유통 부문을 매각하면서 제조업에 ‘올인’할 것임을 대외적으로 천명했다. 빈그룹의 브엉 회장은 자신의 고향인 하이퐁에 베트남 최초의 자동차 브랜드인 빈패스트 공장을 설립했으며, 하노이 인근 첨단산업단지인 호아락에 스마트폰과 가전공장을 마련했다.

이번 판결에 대해 페이스북 등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올라온 베트남 내부의 평가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2명의 정통부 장관이 각각 종신형과 14년형을 받은 데다 공산당에서도 퇴출되는 등 중형을 받았다는 점에서 베트남 공산당의 사정 한파가 당분간 지속될 것이란 해석이 지배적이다. 부정부패 일소를 내세우고 있는 베트남 공산당의 의지가 반영됐다는 것이다. 한편에선 인민법원의 판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선 장관만해도 사형에서 종신형으로 감형됐고, 특히 ‘빈그룹 2인자’에 대해선 지나치게 관대한 처벌이 내려졌다는 불만이 큰 것으로 전해졌다.

전문가들은 이번 판결의 의미를 좀 더 확장된 시각에서 봐야한다고 지적한다. 민간 기업, 특히 대기업을 중심으로 경제 성장을 이끌겠다는 베트남 정부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부 전 회장에 대한 인민법원의 선고 이유에 잘 담겨 있다.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지만, 빈그룹과 마산그룹의 자발적인 산업 구조조정만해도 정부의 중개 혹은 개입 없이 이뤄졌을 것으로 보는 이들은 많지 않다. 빈그룹은 한국과 중국처럼 베트남 제조업의 중흥을 이끌고, 마산그룹은 내수에 집중한다는 전략을 세웠을 것이란 추론이다. 응우옌 쑤언 푹 베트남 총리는 지난해 방한에서 이재용 삼성 부회장과 만나 베트남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번 재판을 통해 일종의 ‘면죄부’를 받은 빈그룹이 향후 어떤 행보를 이어갈 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박동휘 하노이 특파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