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소비자물가가 0.4% 상승하는 데 그쳐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정부는 “저물가는 농산물과 석유류 가격 하락 등 공급측면에서 발생한 것”이라지만, 농산물·석유류를 제외한 근원물가도 0.9% 상승에 그쳐 1999년(0.3%) 이후 가장 낮았다.
정부 설명과 달리, 경기둔화가 지속되면서 소비·투자 등 수요 부진이 저물가를 심화시키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메르스 사태(2015년), 외환위기(1999년) 등 경기에 큰 충격이 가해졌을 때 예외적으로 0%대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기록한 점을 떠올리면 수요 부진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뜻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해 수출은 전년보다 10.3% 줄었다. 2009년(-13.9%) 이후 10년 만에 두 자릿수 감소율이다. 수출 부진이 지속되면 투자 회복은 더 멀어진다.
명목 국내총생산(GDP)을 실질 GDP로 나눈 GDP 디플레이터가 하락세를 보이고 있는 데다 국내 수요와 수출 부진의 장기화를 감안하면, 정부가 디플레이션(지속적인 물가 하락에 따른 경기침체)을 마냥 부인하는 것을 신뢰하기 어렵다. 다수의 전문가가 “우리 경제가 디플레 초입에 다다랐다”는 진단을 내놓고 있다. 급격하게 최저임금을 끌어올리면서 소득을 높이면 소비가 늘고 투자가 늘 것이라고 했던 ‘소득주도 성장’의 허상과 폐해를 그대로 보여주는 상황이다.
경제가 정상적인 물가 상승률 범위에서 상당히 벗어났다면 수요를 촉진하는 게 무엇보다 시급하다. 하지만 정부는 제 발등 찍는 자해적 정책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탈(脫)원전 정책만 해도 관련 기업들이 위기로 내몰리고 일자리가 사라지고 수출이 막히는 등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부자에 대한 각종 징벌적 과세도 그렇다. 세계 주요국들이 법인세율 인하경쟁을 벌이는데 거꾸로 올린 것도, 기업을 적폐로 몰고 기업인을 죄인 취급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정책을 바로잡지 않으면 소비도 투자도 살아나기 어렵다.
시장생태계의 선순환을 막는 ‘독소 규제’가 넘쳐나는 것도 문제다. 노조에 기울어진 노사환경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파업이 빈발하는데도 사측이 대응 수단을 갖지 못하면 기업활동 자체가 어려워진다. 최저임금 급등의 후폭풍이 가시기도 전에, 주 52시간 근로제가 강행돼 멀쩡한 기업들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 화학물질 규제 강화는 외국인직접투자(FDI)의 발길마저 돌리게 하고 있다.
신사업에 뛰어드는 기업들도 고통을 겪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개인정보 활용의 길을 터주는 ‘데이터 3법’(개인정보보호법·정보통신망법·신용정보법 개정안)은 지난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국내에서는 원격의료가 허용되지 않고, 승차공유 서비스가 여의치 않아 해외로 나가 투자하는 기업도 한둘이 아니다. 신사업에서 일자리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청년들의 취업문은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다.
저성장·저물가 함정에서 탈출하려면 다른 방도가 없다. 소비와 투자에 신바람이 불게 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경제에 해가 되는 정책을 멈추고 수요 부진 타개책을 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