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2020년 통화신용정책 운영 방향’에서 국채 매입을 늘리고 대출 지원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유동성 공급을 확대하기 위해 기준금리 인하 이외에 ‘소규모 양적완화’도 병행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한은은 “시장 상황 변화에 신축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유동성 공급채널을 점검하고 국고채 보유 규모를 확대하겠다”고 설명했다. 한은이 금융회사에 돈을 빌려줄 때 담보로 잡는 적격담보증권의 범위를 확대하겠다는 방침도 밝혔다.
한은이 국채 매입을 늘리겠다고 밝히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국채 매입은 글로벌 금융위기 후 미국, 유럽, 일본 중앙은행들이 경기부양을 위해 실시한 양적완화의 대표적 수단이다. 한은은 국채 매입 규모와 기간 등에 비춰볼 때 미국 등의 양적완화와는 성격이 다르다고 하지만 시중에 유동성을 적극 공급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차이가 없다.
한은이 작심하고 돈을 풀기로 한 것은 내년 경기도 녹록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통화정책 방향에서 “성장세가 잠재성장률을 밑돌면서 GDP갭의 마이너스 폭은 소폭 확대될 전망”이라고 한 것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돈을 푼다고 경제가 살아날지는 의문이다. 정부는 이미 경기부양과 복지 확충 및 내년 국회의원 선거를 겨냥한 선심성 사업에 막대한 재정을 쏟아붓고 있다. 2018년 대비 올해와 내년 예산 증가율이 20%에 육박한다. 그럼에도 생산 소비 투자 등 주요 경기지표는 살아날 기미가 없다.
경기 부진은 온갖 규제로 기업활동이 극도로 위축된 데다 미·중 무역분쟁 등에 따른 글로벌 경기둔화로 수출마저 장기간 줄어든 때문이다. 시중에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시중에는 너무 많은 돈이 풀려 부동산 가격 폭등과 같은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올 10월 기준 광의의 통화량(M2)은 2874조원으로 2017년 말 대비 16% 늘었다. 통화량은 올 들어 월 평균 18조원가량 증가하는 추세다.
이렇게 시중자금이 풍부한데 추가로 돈을 푸는 것이 과연 경기부양에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다. 돈이 얼마나 잘 도는지를 보여주는 통화승수가 추세적인 하락세를 보이고 있는 것도 ‘한국판 양적완화’를 찬성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다. 원화는 기축통화가 아닌 만큼 아무리 통화량이 늘어도 대외결제 등에서 역할은 달러나 엔화에 비해 제한적이다. 게다가 과도한 유동성은 거품을 낳게 마련이고 이는 언젠가 터진다.
경제를 살리는 첩경은 기업을 뛰게 만드는 것이며 이는 규제완화와 구조조정이 뒷받침될 때 가능하다. 중앙은행마저 ‘돈풀기 포퓰리즘’에 빠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