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제약사들 '코리아 패싱' 심해진다

입력 2019-12-25 18:41
수정 2019-12-26 00:53
혁신 신약에 제값을 주지 않는 국내 건강보험 시스템 때문에 다국적 제약사들이 건강보험공단과 신약 협상을 포기하는 ‘코리아패싱’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고 비싼 약값을 고스란히 내야 하는 환자들의 치료비 부담만 높아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심한 두드러기 증상 등을 호소하는 국내 환자들은 만성두드러기 치료제인 졸레어 주사를 맞을 때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한다. 한두 달에 한 번 60만원 정도인 약값을 모두 환자가 내야 한다. 졸레어를 판매하는 다국적 제약사 노바티스가 이 약을 국내 건강보험 항목에 올리려던 계획을 철회했기 때문이다.

환자들은 지난해 졸레어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약제급여평가위원회를 통과하면서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약제급여평가위원회는 제약사가 건강보험공단과의 약가 협상을 하기 전 거쳐야 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단과 노바티스는 약값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노바티스가 한국 건강보험 시장에 진입하는 대신 중국에서 적정한 약값을 받는 게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중국 보건당국은 졸레어 약값을 정하기 위한 참조국 중 하나로 한국을 추가했다. 한국에서 약값을 낮춰 받으면 중국 약값도 낮아질 수밖에 없다. 노바티스는 한국보다 구매력이 20배 큰 중국 시장을 택했다. 한국과 달리 중국 환자는 졸레어로 치료받을 때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미쓰비시다나베파마코리아의 루게릭치료제 라디컷도 비슷한 사례다. 이 회사는 지난 6월 국내 건강보험 급여 등재 계획을 철회했다. 캐나다에서 한국을 약값 참조국으로 포함하면서다. 이 약은 다른 나라의 약가 협상에 영향을 덜 받도록 실제 약값보다 높은 표시 약값을 공개하는 환급형 위험분담제 대상이었다. 높게 표기한 표시가격조차 낮다는 판단에 따라 한국 보험 시장을 포기한 셈이다. 국내 루게릭 환자들은 매달 150만원 정도인 약값을 그대로 내고 있다.

암 환자 치료에 널리 활용되는 면역관문억제제도 마찬가지다. 국내 폐암 환자들은 해외 환자들보다 BMS의 옵디보, MSD의 키투르다 등을 쓰는 데 제약이 많다. 건강보험 약가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어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75% 이상이 폐암 환자 첫 치료제로 키트루다를 쓸 때 건강보험 혜택을 주고 있다. 하지만 한국 환자는 아직 혜택을 받지 못한다.

보건의료계 관계자는 “한국은 단일 건강보험제도를 운영하기 때문에 건강보험공단의 구매력은 상당히 높지만 그만큼 신약 가치를 평가하는 방법은 제한적”이라며 “다국적 제약사와 공단 간 힘겨루기에 피해를 보는 것은 환자”라고 했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