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부터 한국전력 국민연금관리공단 등 129개 공기업과 준정부기관은 임직원의 퇴직금 산정에 성과급을 포함할 수 있게 된다. 공기업은 적자를 내더라도 일자리 창출, 상생협력 등을 잘하면 높은 경영등급을 받을 수 있는 구조여서 공공기관의 ‘방만경영’을 부채질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기획재정부는 지난달 정부 경영평가를 받는 129개 경영평가 대상 공기업과 준정부기관에 “퇴직금 산정 때 성과급을 포함하고 이에 따른 추가 인건비를 내년 재정에 반영하라”는 지침을 내린 것으로 23일 확인됐다. LH(한국토지주택공사) 등 상당수 공공기관은 이달 초 퇴직금 산정 기준을 개정했다. 이에 따라 공기업 임직원은 내년부터 퇴직금이 수백만원에서 1000만원대까지 늘어난다. 퇴직금 산정 기준이 되는 평균임금(퇴직 전 3개월간 임금 평균)에 성과급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대법원 판결에 따른 조치”라고 밝혔다. 지난해 10월 한국감정원을 시작으로 한국공항공사 한국산업인력공단 한국마사회 등의 퇴직금 소송에서 대법원은 “계속적·정기적으로 지급하고 있으며 지급 대상과 조건 등이 규정돼 있다면 퇴직금 산정 기준에 들어간다고 봐야 한다”고 판결했다.
공기업의 퇴직금 산정 기준 변경은 매년 실적(손익)을 바탕으로 성과급을 책정하고 이를 퇴직금에 반영하지 않는 민간기업과 동떨어진 것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공기업 성과급은 재무 실적보다 ‘사회적 책임’ 등 모호한 기준을 토대로 지급해 손실을 보더라도 성과급을 받는 사례가 부지기수다.<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margin:25px 0; border:1px solid #c3c3c3" />건보공단·한전, 손실 내고도 매년 성과급…퇴직금까지 불어난다
기획재정부는 매년 7월 129개 공기업 및 준정부기관의 경영성과를 등급화해 발표한다. S~E까지 6개 등급으로 C등급 이상만 받으면 임직원에게 성과급이 지급된다. 하지만 실제 내용은 성과와 상관없다. 공기업들의 경영실적이 나날이 나빠지고 있지만 올해 7월 D등급 이하를 받은 곳은 17개로 전체의 13%에 불과했다. 심지어 순손실 상위 10개 공기업 가운데 일곱 곳이 성과급을 받았다. 직원들은 수백만원, 사장들은 수천만원씩을 받았다. “공기업이 매년 성과급 잔치를 한다”는 비판을 받아온 이유다. 내년부터는 이 같은 성과급이 퇴직금에 반영되면서 공기업의 경영부담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성과 없는 ‘성과급’
당초 경영평가 성과급은 박근혜 정부에서 공공기관 개혁 속도를 높이기 위해 도입한 제도다. 호봉제를 철폐하고 성과 연동 급여제를 확산하는 만큼 공기업 직원들에게 인센티브를 주겠다는 취지였다. 한국가스공사와 한국전력 등 공기업 노조들이 2017년 해당 성과급을 반납하며 반발한 이유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 공공기관 개혁이 사실상 백지화되면서 경영평가 성과급은 정책 목표 달성을 위해 공기업에 제시하는 ‘당근’으로 변질됐다. 성과급 지급 기준도 100점 만점에 19점이던 ‘사회적 책임’ 부문은 30점으로 늘리고, 재무실적에 해당하는 ‘일반 경영관리’는 31점에서 25점으로 배점을 줄였다. 2017년 3785억원 이익에서 지난해 3조8954억원의 대규모 손실로 돌아선 국민건강보험공단이 A등급, 같은 기간 1조4414억원에서 1조1745억원으로 적자전환한 한국전력은 B등급을 받아 성과급이 지급됐다. 건보는 보장성 강화를 골자로 하는 ‘문재인 케어’를 앞장서 이끄는 과정에서, 한전은 탈원전정책으로 대규모 손실을 냈다.
개인의 성과와 무관하게 균등 지급되는 기관이 많은 점도 민간기업의 성과급과는 다르다. 건보는 성과급이 나오면 개인 평가등급이 어떻든 노조가 B등급에 맞춰 성과급을 배분했다. S등급 또는 A등급을 받은 사람이 B등급보다 많이 받은 금액만큼을 노조에 반납하면 C등급 및 D등급자에게 나눠주는 방식이다. 비난이 빗발치자 건보는 올해부터 성과급을 차등 지급하고 있다.
민간으로 불똥 튀나
이 같은 공기업 성과급 지급의 특수성은 대법원이 퇴직금 반영을 판단하는 핵심 근거가 됐다. 지난해 12월 한국공항공사 퇴직자들의 관련 소송 1심 판결에서 재판부는 “회사가 근로자들에게 경영평가 성과급을 예외 없이 지급해온 만큼 노사 양측이 해당 급여를 주고받을 것으로 매년 예상할 수 있었다”며 “성과에 따른 우발적·일시적 급여가 아닌 만큼 퇴직금의 근거가 되는 임금에 포함돼야 한다”고 판결했다. 2심 재판부도 “지급액은 바뀌더라도 매년 지급해온 만큼 근로자가 받을 것으로 예상하는 임금에 포함된다”고 했다.
성과급의 퇴직금 반영으로 한국공항공사 퇴직자들은 근속 기간에 따라 100만원부터 400만원까지 퇴직금을 추가로 받았다. 본인과 소속 공기업 경영성과평가에 따라 1000만원 이상을 더 받아가는 퇴직자도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임금 채권 소멸 시효인 3년 이내에 퇴직한 이들을 중심으로 관련 청구가 잇따르며 공기업들의 인건비 부담도 높아질 전망이다.
문제는 이 같은 성과급의 퇴직금 반영이 민간기업으로까지 확산될 수 있다는 점이다. 곽용희 자동차산업협회 노사혁신포럼 위원은 “정기적으로 지급하면서 지급 조건과 대상이 규정에 명시돼 있으면 성과급도 퇴직금에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 최근 법원의 일관된 판단”이라고 설명했다. 임금 지급 규정에 성과급 지급을 명시해뒀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오랜 기간 매년 지급해 근로자가 지속성을 인식하는 상태라면 민간기업이라도 공기업 등과 똑같은 법적 판단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대내외 경제 환경이 나빠지고 불확실성이 커지는 가운데 산업현장을 뒤흔드는 법원 판결이 늘고 있다”며 “기업이 경쟁력을 가지려면 임금체계는 가급적 단순하고 유연해야 한다는 원칙에 역행하는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노경목/백승현 기자/최종석 전문위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