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부동산에 간접 투자하는 부동산펀드가 사상 처음 순자산 100조원을 넘어섰다. 정부의 연이은 고강도 부동산 대책이 발표되자 갈 곳 잃은 시중자금이 규제를 피해 상가, 오피스빌딩, 해외 자산에 투자하는 부동산펀드로 쏠리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22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국내 부동산펀드의 순자산은 지난 19일 기준 100조461억원으로 집계됐다. 이달 들어 보름여 동안 1조원가량 증가했으며 ‘12·16 부동산 대책’ 발표 이후 사흘 동안에만 2000억원 가까운 자금이 새로 유입됐다.
부동산펀드 순자산은 2017년부터 가파르게 증가했다. 작년까지 매년 15조원 이상씩 늘어나다 올 들어선 23조원 가까이 불어났다. 주택시장 규제에 따른 풍선효과 측면이 크다는 게 업계 분석이다. 상대적으로 규제가 덜하고 각종 세제 혜택(배당소득세 인하 등)이 있는 간접상품으로 돈이 몰린다는 설명이다.
최근 들어선 해외 부동산펀드가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올 들어서만 15조원 이상 급증했다. 순자산 55조원으로 국내 부동산펀드보다 많다.
개인 자금이 부동산펀드로 몰리면서 주식형펀드는 쪼그라들고 있다. 부동산펀드 순자산이 최근 10년 새 열 배 급증하는 동안 주식형펀드에선 오히려 30조원 가까이 빠졌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12·16 부동산 대책의 풍선효과로 주택을 구매하려던 대기자금이 규제가 덜한 오피스, 상가 등으로 유입되면서 부동산펀드로의 자금 쏠림 현상은 더 심해질 것”이라고 말했다.<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margin:25px 0; border:1px solid #c3c3c3" />자산가 "규제에도 믿을 건 부동산 투자"…공모리츠·펀드 '완판 행진'
서울 송파동에 사는 김여진 씨(39)는 최근 내집 마련을 포기하고 보유 현금을 리츠(REITs·부동산투자회사)펀드 등에 넣기로 했다. 박씨는 “이번 ‘12·16 부동산 대책’으로 금융권 대출이 막히면서 강남권 내집 마련 꿈을 결국 접을 수밖에 없었다”며 “정부 규제에도 부동산만 한 투자 대안을 찾기 어려워 규제가 덜한 간접투자 상품인 리츠펀드 등에 분산 투자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서울 연희동에 사는 이정훈 씨(38)도 지난달 마이너스통장까지 동원해 롯데리츠 공모주에 청약했다. 이씨는 “위기가 오면 사실상 휴지조각이 되는 주식과 달리 부동산은 그래도 땅이라도 남지 않느냐”며 “펀드도 이제 부동산 말고는 투자할 만한 게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고강도 규제 피해 간접투자로
부동산펀드가 사상 처음 100조원을 넘어섰다. 오피스 빌딩이나 백화점·마트, 물류창고 등 상업용 부동산에 투자하는 펀드가 기관투자가는 물론 개인투자자 자금까지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갈수록 강도가 세지는 정부 부동산 규제 대책이 이 같은 열기에 기름을 부었다는 평가다. 부동산 직접투자를 억제하자 상대적으로 규제가 덜한 간접투자 상품으로 자금이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부동산펀드는 나오자마자 ‘완판’ 행진이다. KB자산운용이 지난달 말 내놓은 부동산 공모펀드인 ‘KB와이즈스타부동산투자신탁3호(5년 만기 폐쇄형)’는 출시 후 5일(영업일 기준) 만에 판매가 마감됐다. 서울시청 인근 센터플레이스빌딩에 투자하는 이 펀드는 연 6%가량의 배당금을 6개월마다 지급하는 조건이다.
앞서 옛 국민은행 명동사옥을 호텔로 재개발하는 사업에 자금을 대출해주는 ‘와이즈스타부동산투자신탁1호’(750억원) 역시 3년6개월간 중도환매가 불가능한 조건임에도 판매 시작 후 10분 만에 완판됐다.
증시에 상장돼 개별 종목처럼 거래할 수 있는 상장 리츠에도 자금이 몰리긴 마찬가지다. 이달 5일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된 NH프라임리츠는 지난달 일반 공모주 청약에 7조7500억원에 달하는 청약증거금(신청금액의 50%)이 몰려 317.6 대 1이라는 기록적인 경쟁률을 보였다. 지난 10월 증시에 입성한 롯데리츠도 63.3 대 1의 높은 청약 경쟁률을 나타냈다.
저금리에 증시 부진도 한몫
저금리 기조로 시중 부동자금이 1000조원에 육박하고 있지만 국내 증시의 불확실성이 확대되면서 갈 곳 없는 자금이 부동산펀드로 몰리는 측면도 크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9월 말 현재 현금과 요구불예금, 수시입출식 저축성예금, 머니마켓펀드(MMF), 종합자산관리계좌(CMA) 등을 합친 단기 부동자금은 990조원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국내 주식은 거의 제자리걸음을 했다. 서울 강남의 한 증권사 프라이빗뱅킹(PB)팀장은 “긴말할 것 없이 10년 전 주식형 펀드에 돈을 넣은 사람과 서울 아파트를 산 사람을 단순 비교해봐도 국내 투자자들이 ‘주식’ 하면 치를 떠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동산펀드에 대한 각종 세제 지원도 한몫했다. 정부는 2000년대 중반 이후 외환거래 등 관련 규제를 개선한 데 이어 펀드가 보유한 부동산에 대한 재산세 분리과세, 리츠 투자수익 분리과세 등 세제 혜택을 잇따라 도입했다.
지나친 쏠림에 과열 우려도 나와
과도한 부동산 쏠림 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 대형 증권사 관계자는 “서울 중심가의 오피스 빌딩은 가격이 치솟아 자산가격 대비 임대수익률이 연 4%대로 내려앉았다”며 “은행 선순위 담보대출금리가 연 1%에 불과한 유럽 주요 도시와 비슷한 수준이어서 상대적으로 고평가됐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공모형 부동산펀드에 대한 우려 역시 높다. 업계에서조차 “기관들이 끝물이라고 판단해 투자하지 않는 물건을 개인들에게 떠넘기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기관 대상 사모펀드는 만기 때 부동산 시세가 떨어지면 투자자 합의로 만기를 연장할 수 있으나 공모펀드는 연장이 사실상 불가능해 경우에 따라 원금 손실 우려도 있다.
이호기/이현일 기자 h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