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꽃가루·곰팡이·흙…이 모든 게 범죄의 단서

입력 2019-12-19 14:40
수정 2019-12-20 00:41
사람은 다양한 형태의 죽음을 맞는다. 살인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죽음이다. 치밀하게 계획된 살인 범죄는 도저히 진실을 알기 힘들 것만 같다. 하지만 ‘자연’은 희생자를 위해 진실을 남겨둔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조용한 시골길을 훑고 지나간 타이어의 진흙, 신발 밑창에 박힌 꽃가루는 부단히 진실을 알려준다. 균류에 잠식되지 않는 한 꽃가루와 포자는 수백만 년을 견딘다. 그렇기에 꽃가루는 과거의 환경을 재구성하고 변화를 추적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꽃은 알고 있다》는 꽃가루로 진실을 밝히는 법의생태학 세계로 안내한다. 저자는 법의생태학 선구자이자 식물학자인 영국 출신의 퍼트리샤 윌트셔다.

식물학을 공부하던 윌트셔가 법의생태학에 뛰어든 것은 경찰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때문이다. 살인을 저지른 범인의 차량에 묻은 옥수수 꽃가루를 조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이후에도 윌트셔는 연인을 살해한 남자의 운동화에서 발견한 자작나무 꽃가루로 시체가 묻힌 장소를 찾고, 희생자의 콧속에서 추출한 알갱이로 가해자에게 종신형을 선고받게 했다. 그가 25년간 해결한 사건은 300여 건에 달한다.

법의생태학은 범죄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연 세계의 한 측면을 해석해 경찰을 돕는 역할을 한다. 법의생태학자는 살인뿐 아니라 폭행이나 성폭행 사건이 발생한 곳에서도 자연이 남긴 꽃가루, 곰팡이 포자, 흙, 미생물을 조사한다. 자연에 남은 흔적을 통해 피해자나 범인을 어떤 한 장면에 놓고 유·무죄 여부를 가릴 증거를 찾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카메라에 찍히는 것 이상으로 자연을 통해 세세하게 추적할 수 있다. 25만 종이 넘는 식물, 500만 종의 균류, 3000만 종이 넘는 곤충과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움직임에도 자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는다. 저자는 “당신이 어느 길을 따라 집으로 걸어왔는지, 어떤 벽에 기대 연인을 기다렸는지도 알 수 있다”며 “우리가 환경에 흔적을 남기듯 환경 또한 우리에게 흔적을 남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김아림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364쪽, 1만6500원)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