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는 간간이 들리던 공화주의가 요즘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실업, 빈곤, 저성장, 무질서 등 경제 문제로 나락에 떨어진 한국 사회를 구출할 수 있는 구원투수가 공화정(共和政)이라고 한다. ‘나랏일을 집안일보다 중시하는 태도’가 공화다. 누구에게나 솔깃하게 들리는 말이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시장은 이기심을 지원한다는 이유에서 반(反)시장적이고 국가주의적이다. 자유로운 시장교환은 필연적으로 어느 한 편이 다른 편에 대한 ‘지배’를 부르게 마련이기에 시장은 공익을 추구하는 국가에 예속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부자가 정치·경제적으로 빈자를 지배할 위험성 때문에 불평등을 시정할 공공정책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런 논리에 따른다면 경제를 파탄으로 이끌었을 뿐인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제 등은 정당한 제도다. 국가가 저소득층을 기업의 지배로부터 경제적으로 해방시켜주기 때문이다. 강자의 지배로부터 약자를 해방하려는 명분의 경제민주화법도 정당한 규제다.
경제 문제는 첩첩이 쌓인 규제와 방만한 이전지출로 인해 자유가 제약됐기 때문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감안하면 공화사상은 시대착오다. 한국 경제에 필요한 건 규제를 풀고, 세금을 낮추고, 정부지출을 줄여 경제적 자유를 확대하는 것이다. 시장은 사익만 추구한다는 공화론의 인식도 틀렸다. 시장에서 개인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좇아 행동해도 실업, 빈곤, 성장 등 공익 문제를 정부보다 훨씬 더 잘 해결한다는 걸 직시해야 한다.
공화주의는 정치집단이 사리사욕에 몰입한 나머지 민주정이 타락됐다고 불평한다. 그들에게는 공익에 헌신하는 태도, 즉 ‘시민적 덕’이 없다고 개탄한다. 우리 눈으로 직접 목격하듯이 입법부는 차별·단기 입법, 정실주의 입법 등 법이라고 볼 수 없음에도 법의 탈을 씌워 매년 수만 쪽의 법을 찍어내고 있다. 원칙 없는 예산 나눠먹기도 꼴사납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실패다.
공화론은 실패의 원인을 입법자의 부도덕성에서 찾는데, 이것이 전적으로 옳은 건 아니다. 인간은 제도의 틀에서 행동하기 마련이다. 행동의 잘못이 제도 탓인 이유다. 민주제의 실패 원인도 헌법제도의 잘못에서 찾아야 한다. 대통령의 권력과 의회 예산·입법권을 효과적으로 제한할 헌법이 부실하다. 대통령에게 공직자 범죄 수사·기소권을 사실상 부여하는 공수처법 제안도 헌법의 부실 탓이다.
시민적 덕은 사법부가 정치적으로 독립적 위치에서 소임을 다하기 위한, 소박한 필요조건일 뿐이다. 필수불가결한 건 정치적 독립을 확립·유지할 헌법장치다. 헌법을 수호할 과제를 가진 헌법재판소가 제 구실을 못하는 것도 헌법 자체의 부실 때문이다. 한국 헌법은 외부로부터 스스로를 수호할 장치가 없다. 오늘날 정치가 ‘무정부적 혼란’에 빠진 건 그래서다. 원래 자생적 질서인 시장사회가 나락에 빠진 것도 정치질서의 그런 혼란 때문이다.
자유주의가 중시하는 건 헌법을 통한 국가권력의 빈틈없는 제한이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권력(대통령·의회 권력)이라고 해도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침해하지 않도록 그 권력을 헌법으로 제한하는 것이 자유주의의 목표다. 그러나 공화정은 그런 헌법을 통해 민주정의 타락을 극복하는 대신 공익에 헌신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민주제에 의존한다. 그래서 중요한 건 공익 개념이다.
자유주의에서 공익은 시장을 비롯한 자생적 질서의 확립·보호 그리고 안보, 외교 등 소수 공공재의 공급이다. 그 선을 넘으면 공익이 특정 그룹의 이익을 대변하게 된다. 이런 우(愚)를 범한 게 공화제의 공익이다. 다수가 결정한 것이면 무엇이든 공익이기 때문이다. 소득주도성장, 적폐 청산, 탈(脫)원전 등 현 정권의 정책 가운데 공익이 아닌 것을 분별할 논리가 없다. 공화제에는 국가권력을 제한할 어떤 장치도 없다.
정치 참여자들은 무엇이 공익인가를 완전히 안다는, 공익 실현에 헌신해 이타적이라는 전제가 공화제에 깔려 있다. 하지만 이는 ‘치명적 자만’이다. 공화의 길은 프랑스 로베스피에르의 독재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만을 극복한 게 미국 건국 시조 제임스 매디슨의 경제적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자유주의다. 그것이 오늘의 처참한 경제 문제의 해결사요, 보편적 번영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