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시] 화상 - 김경미(1959~)

입력 2019-12-15 11:06
수정 2019-12-16 00:52
경제와 문화의 가교 한경새 도마를 샀다, 토끼무늬들이
피크닉을 가고 있다
도마일 뿐이지만 내 음식 밑에서 언제고
그들의 신발과 피크닉 가방이 나뒹군다
라일락무늬 나무받침에
뜨거운 냄비 얹다가
라일락꽃들 비명에 냄비를 놓친 적도 있다
문 열린 것들과 닫힌 것들이
뒤죽박죽이 되어간다
자운영꽃잎의 물방울들
나에게 더 잘 전해지듯이
나 그대에게 더 잘 전해지지 않듯이

시집 《고통을 달래는 순서》(창비)中

아마도 화자는 토끼 무늬가 그려진 새 도마를 샀나 봅니다. 당근도 썰고 양파도 썰 때마다 그 밑에서 토끼들의 신발과 피크닉 가방이 나뒹군다는 표현이 재밌습니다. 라일락 무늬 나무받침은 또 어떤가요? 뜨거운 냄비 밑에서 꽃은 납작해지고 말 텐데요. 눈을 크게 뜨고 보면 재밌는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알프스산이 그려진 담요를 덮으면, 왠지 높고 명랑한 기분이 드는 것처럼요.

주민현 < 시인(2017 한경 신춘문예 당선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