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詩로 봉사하고 헌신…시인은 서비스맨이죠"

입력 2019-12-12 17:12
수정 2019-12-13 00:20

“지금 시대에 시인은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상실을 겪으며 힘들어하는 많은 이들 가까이에 앉아 그저 축복하고 응원해주는 게 시인의 역할이죠. 일흔 살이 넘어 곧 용도폐기될 인간이지만 그게 제가 세상에 아직 남아 있는 이유입니다.”

나태주 시인(74)은 12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등단 50주년 기념 신작 시집 <너와 함께라면 인생도 여행이다>(열림원)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평생 품어온 시인으로서의 가치관”이라고 했다. 나 시인은 “구성이 대단하고 함량 높은 시라도 독자들은 시인이 빗장을 채우고 문지기를 세워놓은 채 ‘아무도 들어오지마’라고 하는 시들을 원하지 않는다”며 “시인은 서비스맨이란 생각을 갖고 사람들에게 시로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 시인은 1971년 등단한 이후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한 목소리로 사소한 것들에 대한 애정을 시에 담아왔다. 한 여자를 생각하며 열여섯 살부터 쓰기 시작한 그의 시적 대상은 시간이 흐르며 불특정 다수로 바뀌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살피고 나 자신을 보게 하는 겸손한 긍정과 겸허한 감성이 그의 시 곳곳에 묻어난다. 나 시인은 “사람들은 꽃밭 속 꽃이며 시는 이 꽃들을 향한 연애편지이기에 예쁜 마음으로 평생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끼고 좋아하는 마음으로 시를 써왔다“고 말했다.

신간 시집은 그동안 써온 시를 단순히 모아놓은 게 아니라 시인의 50여 년 시력을 간추려 놓은 자서전에 가깝다. 1부에 신작 시 100편을 실었고, 2부에는 독자들이 사랑하는 애송 시 49편, 3부에는 나 시인이 사랑하는 시 65편을 담았다. 시집에 실린 시 가운데 그의 74년 인생을 대표하는 시는 무엇일까. “모든 시는 내 자서전의 일부죠. 하지만 ‘많이 보고 싶겠지만/조금만 참자’라는 두 구절로 된 ‘묘비명’이란 시가 제 인생 전체를 하나로 표현한 문장이 아닐까 싶어요.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누군가를 보고 싶어 한다는 거예요. 또 다른 문제는 죽음이죠. ‘조금만 참자’는 구절은 제 묘를 찾아올 자녀들에게 ‘너희도 조금 있으면 죽으니 그동안 열심히 살아라’라는 메멘토(사람·장소를 기억하기 위한 기념품) 같은 메시지죠. 실제로 묘비에 쓸 생각이에요.”

나 시인은 12년 전 췌장에 생긴 문제로 긴 투병생활을 했다. 병을 털어낸 뒤 활동량은 그 전보다 더 많아졌다. 제주와 목포, 강릉 등 전국을 다니며 연간 평균 200여 회 강연을 하고 있다. 집 안 책상에 앉아 쓴 시 대신 걷고 뛰고, 기차를 타고, 버스를 기다리면서 휴대폰 메모장에 틈틈이 써온 신작 시로 시집의 1부를 채웠다. 그는 “유목민처럼 이동하며 쓴 시들 덕분에 74세 나이에도 새로운 삶의 형태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나 시인은 초등학교 교사로 살아오며 얻은 ‘교장 시인’이란 별명보다 ‘풀꽃 시인’으로 더 유명하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란 세 구절로 된 ‘풀꽃’이란 시가 수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풀꽃’이란 대표 시에 가려져 다른 시들이 묻히는 게 아쉽진 않을까. “시인의 대표작을 결정하는 건 시인이 아니라 독자이기에 섭섭하지만 받아들여야죠. 풀꽃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풀꽃 외의 시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죠. 시인은 죽어도 시는 죽지 않기에 작게나마 풀꽃이라는 시를 내가 태어난 모국에 바칠 수 있어서 오히려 감사합니다.”

그에게 좋은 시란 무엇일까. “작가의 마음인 ‘작심’과 문장이 주장하는 길인 ‘문심’, 그리고 독자의 마음인 ‘독심’이 모두 들어 있는 시죠. 그중에서도 독자에게 ‘너도 그렇다’ 다음에 이어질 한 문장을 달아볼 수 있는 여유를 주려고 해요. 읽는 이의 자존감을 채워주는 시야말로 호소력 있는 시랍니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