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킴기즈칸’으로 불리다 막판에 ‘희대의 사기꾼’이라는 악평까지 들어야 했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파란만장했던 그의 인생 역정만큼이나 대우그룹의 32년 역사도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국내 2위이자 세계 18위 기업으로 커나갈 때만 해도 대우는 ‘세계경영’, ‘고속성장’과 동의어였다. 외환위기로 그룹이 허무한 종말을 맞자 ‘부실공룡’, ‘무너진 대마불사(大馬不死) 신화’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쉬지 않고 세계를 무대로 뛰다 몰락한 대우그룹의 역사는 우리 경제사 그 자체였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자본금 500만원으로 시작
대우그룹의 출발은 1967년 3월 설립된 대우실업(현 포스코인터내셔널)이다. 당시 31세였던 김 전 회장 등 직원 다섯 명으로 시작한 무역회사였다. 자본금은 500만원.
대우실업은 처음부터 승승장구했다. 창업 전 한성실업에서 6년간 갈고 닦은 김 전 회장의 사업 수완 덕이었다. 창업 한 달 만에 태국 회사로부터 트리코트(메리야스 편직제품) 주문을 받았다. 동남아시아 국가에 트리코트를 잇따라 수출하면서 김 전 회장은 ‘트리코트 킴’으로 불렸다. 직접 샘플 원단을 들고 대우의 첫 브랜드인 영타이거를 알려 ‘타이거 킴’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1970년대 들어 대우실업의 사세 확장 속도는 더 빨라졌다. 폭발적인 경제성장과 정부의 수출주도 정책에 힘입어 1972년 수출 5위(국내 기업 기준)에 올랐다. 자금력이 커지자 인수합병(M&A)으로 몸집을 불리며 그룹의 면모를 갖췄다. 1973년 영진토건(대우건설)을 시작으로 대우전자(1974년), 한국기계(1976년), 대한조선공사 옥포조선소(1978년), 새한자동차(1978년), 대한전선 가전사업부(1982년) 등을 인수했다. 대우그룹은 창업한 지 10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1970년대 후반에 재계 4위로 등극했다.
국내 2위 기업으로 성장
1980년대 후반부터 김 전 회장의 세계경영이 시작됐다. 주요 무대는 민주화 바람이 불던 동유럽과 옛 소련 같은 사회주의권 국가였다. 무주공산이나 마찬가지였던 이곳에 중공업과 자동차 사업을 통해 대우의 이름을 알렸다. 대우자동차는 미국 제너럴모터스(GM)와의 경쟁 끝에 폴란드 자동차 공장을 인수했다. 1990년대 중반 “대우가 동유럽의 자동차 생산기지를 싹쓸이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세계경영의 속도가 붙자 1993년 185곳이던 대우의 해외 네트워크는 1998년 589곳으로 늘었다. 같은 기간 해외 인력도 2만2000명에서 15만2000명으로 급증했다. 해외 언론은 단기간에 동유럽까지 사업 영토를 확장한 김 전 회장을 ‘킴기즈칸’으로 불렀다. ‘대우스탄’이라는 말도 이때 생겨났다.
대우그룹은 1998년 7월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이 선정한 매출 500대 기업 중 18위의 기업으로 도약했다. 국내에선 1998년 현대그룹에 이어 자산기준 재계 2위로 올라섰다. 삼성그룹과 LG그룹이 그 뒤에 있었다.
외환위기 이후 몰락
대우그룹의 발목을 잡은 건 1997년 외환위기였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에 편입된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이 6계단 떨어지자 대우가 직격탄을 맞았다. 해외 사업장이 가장 많아 극심한 자금 상환 압박을 받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환율까지 폭등해 외화표시부채가 많은 대우는 사면초가에 빠졌다. 1997년 대우의 환차손 규모만 8조5000억원에 달했다.
대우그룹은 1999년 말까지 41개 계열사를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내용의 자체 구조조정 방안을 내놨다. 하지만 정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대우그룹은 해체됐다. 김 전 회장도 “세계경영이란 이름의 도박을 벌인 외줄타기 곡예비행사”(배준호 한신대 국제학부 교수)라는 비판을 받으며 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정인설/김보형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