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추상화가 김영세 화백(68)은 한평생 평면 회화의 혁신을 추구했다.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한 직후 독일로 건너가 머나먼 이국땅에서 ‘회화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며 새로운 미학에 도전했다. 독일 뒤셀도르프 국립미술대 석사과정을 거쳐 쾰른대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1991년 귀국한 그는 초기에 평면과 기하학적 패턴의 상호관계를 그림으로 묘사했다. 캔버스에 대한 실험을 거듭한 끝에 2010년부터 감각적 사유를 즉흥적으로 풀어내는 모노크롬(단색) 작품을 내놨다. “세상에 필연적인 존재는 없고, 모든 것은 우연적”이라고 말했던 김 화백의 회화 정신은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김 화백이 오는 28일까지 서울 압구정동 갤러리 마노에서 펼치는 개인전은 지난 10년간 천착해온 모노크롬 미학을 다채롭게 선보이는 자리다. ‘바람은 집을 짓지 않는다’를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는 아크릴 물감을 롤러로 바탕에 바르고 걸레와 천을 사용해 즉흥적으로 심신의 기억을 채색한 근작 15점을 걸었다. 바람이 집을 짓지 않듯 자연과 더불어 자유로이, 때론 강렬한 깃발이 휘날리듯 춤추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를 담았다.
김 화백은 “산업화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사회적·정신적 불안을 예술로 승화했다”며 “그림의 형식보다 그리는 행위를 중시한 결과물”이라고 설명했다. 작가는 붓 대신 천이나 걸레를 활용해 작업한다. 이젤을 세우고 붓으로 그리는 전통적 방법을 거부하고 캔버스를 바닥이나 벽에 고정한 뒤 통에 든 물감을 지워간다.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생각을 그리기보다 지우기를 통해 그 흔적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지우면서 그려진 다양한 흔적으로 작가의 내면과 정서를 투명하게 환기시키며 독특한 모노크롬 형태를 만들어 낸다.
그의 작품들은 물질의 촉감이나 몸짓효과를 이용한 관념적 ‘액션 페인팅’에 가깝다. 김 화백은 “흰색, 회색, 코발트블루 등의 아크릴 물감으로 바탕을 만들고, 손가락으로 흔적을 내거나 천을 사용해 지워가며 즉흥적으로 몸의 기억을 불러냈다”며 “작품보다는 행동에 주목함으로써 인간의 실존적 고투를 표출하는 데 많은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건축가가 원자재로 골조를 세우고 건축물을 완성하듯 그는 물감을 닦아내면서 우연의 미학을 연출한다. 여기에 인간의 존재와 행위는 물론 회화의 본질적인 개념까지 아울렀다.
그래서인지 작품에는 내재적 리듬감이 잔잔한 캔버스를 타고 여운을 실어나른다. 여과 없이 쏟아내는 격정과는 구별되는 순수한 시각적인 여운이다. 살며시 다가오는 안정된 리듬감에서 질서정연한 감각과 상쾌함이 느껴진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