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낳은 마에스트라 김은선…美 메이저 오페라 '禁女의 벽' 깼다

입력 2019-12-06 17:10
수정 2019-12-07 00:28

한국인 지휘자 김은선(39)이 미국 명문 오페라단 샌프란시스코오페라(SFO)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됐다. 1923년 설립된 SFO의 역대 네 번째 음악감독이자 첫 여성 음악감독이다.

SFO 총감독 매슈 실벅은 김은선이 2021년 8월 1일부터 이 오페라단의 음악감독을 맡는다고 6일 발표했다. SFO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로스앤젤레스(LA) 오페라와 함께 미국 3대 오페라단으로 꼽힌다.

뉴욕타임스는 이날 김은선의 선임 소식을 전하면서 “(김은선은) 미국 메이저 악단에서 음악감독직을 맡는 첫 여성이 될 것”이라며 “그는 새 역사를 쓰고 있다”고 평가했다. 보수적인 클래식 음악계에서 젊은 여성이 오페라단의 예술적 방향을 제시하고 오케스트라뿐 아니라 합창단, 음악 제작진을 이끄는 음악감독에 임명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한국인이 세계 주요 오페라단의 음악감독을 맡는 것은 프랑스 파리 바스티유오페라(현 파리 국립오페라) 음악감독을 지낸 지휘자 정명훈에 이어 두 번째다.

연세대 작곡과를 졸업한 김은선은 2003년 연세대 대학원으로 진학하면서 지휘로 전향했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음악대학 오페라 지휘 과정을 거쳐 2008년 ‘헤수스 로페스 코보스 국제오페라지휘 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하면서 세계 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2008년 스페인 왕립오페라극장, 스페인 왕립음악학교에서 주빈 메타의 보조지휘자로 활약했고 유럽의 주요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하며 경력을 쌓았다.

김은선은 영어뿐 아니라 독일어와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를 익혔고 끊임없이 악보를 파고들었다. 이를 통해 치열한 유럽 음악계에서 단원들과 활발하게 소통하고 레퍼토리가 넓은 지휘자로 자신의 자리를 확보했다. 베를린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 겸 바이에른국립오페라 음악감독인 키릴 페트렌코와 베를린 국립오페라 총음악감독 다니엘 바렌보임도 그를 이끌어준 멘토로 알려져 있다.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해 미국 무대에 데뷔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2017년 휴스턴 그랜드 오페라에서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를 지휘한 것이 미국에서의 첫 무대였다. SFO와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6월 SFO의 여름 페스티벌에서 드보르자크의 ‘루살카’를 선보이면서다. 처음 호흡을 맞춘 후 5개월여 만에 전격 음악감독으로 발탁된 것이다. 실벅은 “김은선은 SFO에 독특한 에너지를 불어넣었다”며 “지휘대에서 뛰어난 비전을 통해 리드할 뿐 아니라 창의적 과정에서 모두가 최고의 역량을 끌어낼 수 있게 했다”고 밝혔다. 김은선은 “당시 무대에서 고향에 있는 것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며 “다양한 측면에서 열려 있어 협업이 가능한 분위기였고 진정한 전문가들이 내뿜는 에너지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번 선임으로 김은선은 임기 5년간 시즌마다 최대 4회의 프로덕션을 지휘한다. 내년 8월 베토벤 오페라 ‘피델리오’로 SFO의 2020~2021시즌을 열 예정이다. 지난달 워싱턴 국립오페라에서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를 지휘한 김은선은 이어 미국에서 LA 오페라, 시카고 리릭 오페라와 공연한다. 2021년 시즌엔 푸치니의 ‘라 보엠’으로 세계 최정상 지휘자들만 설 수 있는 메트로폴리탄 무대 데뷔도 앞두고 있다.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