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을 우대해주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기울어진 운동장’만 아니었으면 하네요.”
서버 장비를 개발하는 스타트업 C사 김모 대표의 말이다. 이 업체는 올초 정부기관 발주 사업에 참여했다. 최종 계약서 사인을 남겨두고 담당 부서에서 몇 번이나 보완 지시가 떨어졌다. 넉 달쯤 지났을 때 “이쯤이면 눈치채야 하는 것 아니냐”는 귀띔을 들었다. 담당 부서에서 이미 마음에 둔 외국 업체가 있어 C사가 스스로 포기할 것을 유도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김 대표는 결국 입찰을 포기했다. 그간 들인 금전적·시간적 노력은 모두 그의 몫이었다.
테크 스타트업 생태계의 주요 구성원 중 하나가 정부다. 모태펀드 등 정책 자금이 벤처투자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다. 하지만 사업 규모를 키우는 스케일업 단계에서는 정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스타트업 꺼리는 조달시장
테크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정부 수단 중 하나는 공공 조달시장이다. 정부가 내세우는 모토는 ‘혁신 제품의 최초 소비자’다. 정부에 제품과 서비스를 팔면서 매출과 경험을 쌓게 해주겠다는 게 공공 조달시장을 만든 이유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스타트업의 설 자리가 넓지 않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검증되고 안전한 제품을 선호하는 공무원 사회의 분위기가 문제다. 같은 중소기업이더라도 10년 이상 업력을 쌓은 기업들이 유리하다는 얘기다.
최저가 입찰 제도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가격을 맞추기 위해선 신기술이 들어간 도전적인 제품이나 서비스를 배제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한 테크 스타트업 관계자는 “특정 기업만 충족시킬 수 있는 요건을 내건 입찰 공고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업종에 따라선 “공공보다 민간 사업을 따내는 게 더 쉽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한 하드웨어 스타트업 관계자는 “제품 선정 뒤 문제가 생기면 담당 공무원의 책임이 된다”며 “검증되지 않은 제품으로는 공공 조달시장을 공략하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잘돼도 걱정, 안돼도 걱정”
스타트업을 떠받치는 또 다른 정책수단으로 국책 연구과제가 꼽힌다. 자금이 많이 필요한 연구개발(R&D) 프로젝트를 정부 자금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테크 스타트업들의 관심이 높다.
문제는 복잡한 서류다. 제출할 문서가 워낙 많다 보니 직원 서너 명으로 시작한 소규모 스타트업들이 엄두를 내기 어렵다. 정부 R&D 프로젝트에 자주 참여하는 기업들은 대부분 서류 작업만 전담하는 별도의 팀을 보유하고 있다.
사업자로 선정되더라도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게 스타트업들의 토로다. 세금을 허투루 쓰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마련한 깨알 같은 장치들이 스타트업의 발목을 잡는 경우가 많다. 정부 자금은 미리 제출한 명목에 한해서만 쓸 수 있다. R&D 프로젝트를 진행하다가 연구 방향을 바꾸는 게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장비도 자유롭게 구입할 수 없다. 해당 프로젝트에 적용되는 물품에만 자금을 쓸 수 있다는 규정 때문이다. 정부는 프로젝트가 끝난 뒤 업체가 계속 사용할 수 있다는 이유로 장비를 지원 대상에서 제외했다. 30세 이하의 청년을 몇 명 이상 고용해야 한다는 생뚱맞은 조건이 붙기도 한다. 분기별로 자금 사용 현황을 보고하고 일일이 증빙자료를 제출해야 하는 것도 적잖은 부담이다.
한 반도체 스타트업 관계자는 “정부가 제시한 조건을 맞추기 위해 숙련된 개발자 대신 신입사원을 뽑을 수밖에 없었다”며 “부수적인 조건이 까다로워 국책 연구과제를 포기하는 기업이 상당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2000년대 초 ‘정보기술(IT) 거품’ 때 불거졌던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 트라우마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고 지적한다. 분식회계와 주가조작 사건이 잇따라 터지면서 비난의 화살이 정부로 집중됐다. 정부의 지원 규정에 깐깐한 검증 조항들이 들어간 배경이다.
스타트업들은 ‘빈대가 무서워서 초가삼간을 태우는 격’이라고 볼멘소리를 한다. 한 스타트업 관계자는 “국책 연구과제 프로젝트의 효과를 끌어올리려면 범위를 정해놓고 그 안에서는 자유롭게 자금을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