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다 험지만 주고 희생하라고 하니 참….”
한 경제부처의 고위 관계자는 5일 내년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잇따르는 전·현직 장·차관 인사 ‘차출설’에 이같이 푸념했다. 여당의 강력한 요구로 출마설이 흘러나오고 있는데, 정작 지역구는 결코 쉽지 않은 험지만 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중심으로 여권의 총선 출마 압박은 거세다. 대상에 오른 인물은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강경화 외교부 장관, 정경두 국방부 장관,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최종구 전 금융위원장, 구윤철 기재부 2차관, 김용진 전 기재부 2차관 등 면면이 화려하다. 이들에게 권유한 지역구는 보수 성향이 강한 이른바 ‘험지’다. 홍 부총리와 최 전 위원장은 각각 강원 춘천과 강릉이, 강 장관은 서울 강남 3구(강남 서초 송파) 또는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지역구인 동작을이 거론된다. 구 차관은 고향인 경북 성주 출마 가능성이 나온다. 한 고위 관료는 “절반만 살아남아도 대성공”이라고 말했다. 반면 청와대 출신 인사들은 민주당 ‘텃밭’에 자리 잡고 있다. 한병도 전 정무수석은 전북 익산을, 정태호 전 일자리수석은 서울 관악을, 김의겸 전 대변인은 전북 군산에서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
관가에선 ‘차출’이란 단어 자체에도 불만을 갖고 있다. 한 경제부처 국장급 관료는 “1000명이 넘는 부처 수장이자 내각의 일원인 장관을 ‘장기판의 졸’로 보고 ‘차출’ ‘징발’이란 말을 쓰는 것 자체가 불쾌하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논란은 2004년 노무현 정부 첫 총선의 ‘데자뷔’다. 장·차관급 ‘늘공’(직업 공무원) 출마자는 모두 아홉 명. 이 중 당선자는 김진표 전 재정경제부 장관(수원 영통)과 변재일 전 정보통신부 차관(충북 청원) 둘뿐이었다. 나머지는 TK(대구·경북)와 PK(부산·경남·울산)에 출마해 모두 낙선했다.
일각에선 “험지 출마 후 보은 인사를 통해 배려해줄 것”이라며 “밑질 게 없다”는 시각도 있다. 2004년 총선에서 낙방한 늘공들은 희생의 대가로 한 자리씩 차지했다. 대구 수성을에서 낙선한 윤덕홍 전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을 지냈다. 경북 경산청도에 나갔던 권기홍 전 노동부 장관은 단국대 총장으로, 추병직 전 건설교통부 차관(경북 구미)은 같은 부의 장관으로 영전했다.
김우섭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