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휘의 베트남은 지금] 호찌민시를 강타한 '반부패' 칼날

입력 2019-12-04 10:57
수정 2019-12-04 11:00
호찌민시를 강타한 반부패 칼날
아파트 개발 사업서 대규모 비리 적발
베트남 정부, 호찌민 부동산 프로젝트 ‘올 스톱’시켜
한국 기업 등 자금 묶인 외국 투자자들
북부 정치권력의 남부 경제권력 길들이기라는 시각도

통일궁은 호찌민시의 유명 관광 명소 중 하나다. 길할 길(吉)자를 형상화, 음과 양의 조화를 구현한 6층짜리 건물은 동서양의 건축미를 절묘하게 결합시켜 건물 자체로도 보는 맛이 좋다. 아침 일찍부터 정문 앞은 이곳을 견학하려는 학생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외국인 관광객들에겐 인근 전쟁박물관과 함께 호찌민 시내 투어에서 빠지면 서운한 필수 코스다.

통일궁이 독립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시절, 남베트남 대통령들은 이곳을 집무실로 사용했다. 1975년 4월30일, 북베트남의 소련제 전차가 대통령궁 바리케이트를 넘어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현 호찌민)을 점령하면서 독립궁은 통일궁으로 바뀌었다. 통일궁에 있는 각각의 공간들은 그 때의 순간들을 고스란히 보존해놨다. 남베트남 정부와 미군 지휘부는 지하벙커에서 시시각각 불리해지는 전황을 들으며, 결국 헬기를 타고 급히 사이공을 탈출했다. 통일궁은 과거의 시간을 박제한 공간이자, 하노이가 사이공을 ‘해방’시켰음을 증명해주는 증표다.

베트남을 대표하는 두 도시인 하노이와 호찌민의 간극은 생각보다 크다. 사이공의 ‘유산자 계급’들은 전쟁의 마지막 순간에 대부분 미국과 유럽으로 떠났지만, 호찌민의 도시 문화는 여전히 자유롭고 개방적이다. 1986년 베트남이 ‘도이모이’라 불리는 개혁·개방을 실시하고, 1990년대에 미국의 경제 제재가 풀리자 외국인 투자자들은 옛 사이공으로 몰려들었다. 도시 형성도 비교적 계획적으로 진행됐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이 땅의 점령자들은 사이공강을 배후 삼아 주거지를 형성했다. 이후 사이공강을 기점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도시의 팽창이 꾸준히 이뤄졌다.

이에 비해 하노이는 예로부터 베트남 정치권력의 중심지다. 하노이의 옛 이름은 ‘용이 승천하는 땅’이라는 의미의 탕롱(Th?ng Long, 昇龍)이다. 베트남 대부분의 주요 도시들이 바다를 끼고 형성된데 비해 하노이는 내륙 깊숙히 들어가 있다. 중국 대륙을 지배했던 여러 왕조들의 침략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요즘의 하이퐁은 주로 하롱베이가 있는 관광 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과거엔 하노이로 침략하려는 외부 세력을 막아 주는 군사 도시였다. 하이퐁의 한자식 이름은 ‘바다를 방어한다’는 의미의 해방(海防)이다. 강과 산을 이용해 왕실을 지키려는 용도로 형성된 하노이는 태생에서부터 폐쇄적인 성향이 강하다.

베트남으로 외국투자자본이 물밀듯이 밀려 들면서 하노이와 호찌민은 해가 갈수록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투자금을 누가 더 많이 확보하냐의 경쟁이다. 베트남에 처음 진출하는 외국 기업들도 인·허가용 ‘도장’을 쥐고 있는 하노이와 각종 경제 인프라를 잘 갖추고 있는 호찌민 중에서 어디를 거점으로 선택할 지를 놓고 고민을 거듭할 정도다. 전통적으로 베트남은 지역 안배를 중시해왔다. 정치권력에도 균형 전략이 잘 반영돼 있다. 서기장을 북부 출신이 맡으면, 주석과 총리는 남부와 중부에서 배출하는 식이다. 하지만 2016년 제12차 당대회를 기점으로 이 같은 관행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 주석과 총리를 북부와 중부 출신이 차지한 것이다. 정치국원도 북부 출신이 11명으로 남부, 중부 출신이 각각 4명씩인 것에 비하여 압도적으로 많다.

최근엔 호찌민에 만연한 부정부패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하노이의 ‘호찌민 길들이기’가 본격화한 것 아니냐는 추론이 나오고 있다. 현재 호찌민의 대형 부동산 프로젝트들은 대부분 멈춰서 있다. 아파트 개발 등 각종 돈이 되는 사업에서 고구마 줄기 캐듯이 부패 사례들이 속출하면서 베트남 정부가 모든 사업을 전수조사하고, 원점에서부터 재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A국영기업의 사례는 부패의 실상이 어느 정도였는 지를 보여준다. 토지 사용권을 갖고 있던 A사는 아파트 단지 개발을 위해 토지를 민간 기업에 매각하는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친인척 기업을 활용한 비리를 저지른 것으로 전해졌다. 정상금액이 100원인 땅을 친인척 회사인 B사에 10원에 매각한 뒤, B사가 외국 기업에 100원에 되파는 수법이다. 국고엔 10원만 들어오고, 나머지 90원은 A사가 사취한 셈이다.

호찌민시 중심가에 있는 유명 백화점인 다이아몬드 플라자 바로 옆에 있는 대규모 부지는 아예 시정부가 압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주차장으로 쓰이며 약 6년 간 방치돼 있던 이 부지는 다이아몬드 플라자의 주인인 롯데쇼핑이 오랫동안 눈독을 들여왔던 땅이다. 토지 가격 산정에서 대규모 비리와 부패가 드러나자 베트남 정부는 부동산 프로젝트와 관련된 토지를 전수조사한 뒤, 가격을 재산정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한국 기업 등 외국인 투자자들은 수백억원의 자금이 묶인 데다 향후 가격 재산정시 추가 비용을 물어야할 위기에 처했다. 호찌민 경제권력에 대한 대대적인 사정 바람은 내년에 치러질 제13차 당대회의 향방과도 무관치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베트남이 지역 균형이라는 정치 관행으로 회귀할 지, 아니면 북·중부 중심의 개발 전략을 장기화할 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박동휘 하노이 특파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