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들어 노인 일자리가 크게 늘었음에도 고령층은 오히려 더 빈곤해진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만 1조7000억원을 쏟아붓는 등 재정을 투입해 대규모 단기 일자리를 마련했지만 최저임금 인상 여파로 노인들이 양질의 민간 일자리에서 밀려난 영향이다.
2일 통계청 가계동향조사 원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60세 이상 가구주 가운데 월 소득이 중위소득(2019년 2분기 기준 209만2000원)의 50% 미만인 가구는 올 2분기 45.8%를 차지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인 2017년 2분기(44.6%)와 비교하면 1.2%포인트 상승했다. 월 소득이 105만원에도 못 미치는 가구가 그만큼 더 늘었다는 얘기다. 올 3분기에는 그 비율이 47.4%로 더 높아졌다. ‘중위소득 50% 미만’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국가별 노인빈곤율을 평가할 때 사용하는 기준이다.
지난 2년간 노인 일자리가 급증한 점을 고려하면 이 같은 빈곤 심화는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2017년 6월 420만 명이던 60대 이상 취업자는 올 6월 479만 명으로 59만 명 늘었다. 같은 기간 전체 취업자 증가폭인 34만 명보다 많다. 현장의 일자리 알선기관 관계자들은 “100만원 이상 받던 민간 일자리가 사라지고 27만원짜리 공공 일자리만 늘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일자리의 양과 질이 개선되고 있다”는 정부 인식과 동떨어진 대목이다. 정부는 올해도 1조7495억원의 세금을 투입해 64만 개의 노인 일자리를 만들었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공공 일자리가 오히려 민간 일자리를 구축하고 빈곤층을 늘린 대표적 사례”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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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청소원 '진짜 일자리'서 밀려난 노인들…'단기 알바'로 내몰렸다
서울 금천구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경비 일을 하던 A씨(68)는 지난해 말 계약 해지로 일자리를 잃었다. 아파트 경비원을 할 때는 월 170만원을 벌었다. 급여 150만원에 기초연금 20만원을 더해서다. 하지만 올해 A씨가 손에 쥔 돈은 월평균 110만원이 채 안 됐다. 기초연금이 작년 9월부터 25만원으로 인상되고, 노인일자리를 통해 정부로부터 27만원을 받았지만 A씨의 삶은 뒷걸음질쳤다. ‘괜찮은 일자리’를 찾기 힘들어서다. 아파트 관리사무소들은 노인을 기피했다. A씨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일 4시간 이상 일해야 50만원 남짓 벌 수 있는 지하철 택배밖에 없었다. A씨는 “월세 30만원에 각종 공과금을 내고 나면 매달 생활이 빠듯하다”며 “노인일자리가 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화가 난다”고 말했다.
“65세 이상은 안 뽑습니다”
추경호 자유한국당 의원이 통계청 가계동향조사 원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정부는 노인일자리와 기초연금 등에 세금을 쏟아붓고 있지만 정작 빈곤 선상에 놓인 노인들의 삶은 나빠지고 있다. 최근 2년간 최저임금이 29% 오른 이후 65세 이상 노인이 많이 일하는 경비와 청소, 식당 등의 일자리는 말 그대로 증발했다.
이 같은 현실은 기자가 지난달 찾은 서울 관악시니어클럽에서 고스란히 나타났다. 게시판에 붙은 구인 공고에는 ‘청소, 월 76만원, 63세 이하’ 등의 식으로 나이 제한 사항이 함께 기재돼 있었다. 전체 공고의 70% 이상이 ‘65세 미만’으로 제한을 뒀다. 노인은 아예 받지 않겠다는 의미다. 시니어클럽 관계자는 “지난해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노인들이 많이 가는 경비와 청소 일자리는 따로 나이 제한을 두지 않았다”며 “일자리는 줄어든 반면 베이비부머(1950년대 후반~1960년대 중반 출생 세대)의 은퇴가 시작되면서 구직자가 크게 늘어난 탓”이라고 설명했다.
민간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노인들은 질 나쁜 일자리로 옮겨가고 있다. 올해 들어 노인들이 가장 많이 가는 자리는 지하철 택배와 보철물 배달 등이다. 65세 이상은 무료로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 택배와 치과 보철물을 운반하고 급여를 받는다. 혹한기나 혹서기에 돌아다니며 길찾기를 해야 해서 근무여건이 경비 및 청소보다 열악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매일 일해도 월 급여가 60만원에 못 미칠 때가 많다.
최저임금 인상, 되레 수입 감소 유발
서울 영등포구의 한 식당에서 일하는 정모씨(85) 역시 최근 월소득이 급감한 사례다. 그는 지난해까지 식재료를 준비하는 일을 했다. 오전 7시부터 낮 12시까지 하루에 5시간 일하면 됐다. 하지만 올해 들어서는 점심 손님이 빠지는 오후 2시까지 7시간 동안 근무한다. 인근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지인이 종업원 한 명을 내보내고 정씨에게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양쪽에서 월급을 받지만 월 급여는 150만원에서 120만원으로 줄었다.
그동안 여성과 노인이 많이 종사해온 청소 일도 수입이 줄기는 마찬가지다. 청소·용역 일을 알선하는 서울 관악구 인력센터의 한 관계자는 “최저임금이 올랐지만 일하는 이들의 소득은 오히려 눈에 띄게 감소했다”고 말했다. 2년 전만 해도 한 달에 25일을 일할 수 있을 만큼 일자리가 넉넉했지만 올해 들어서는 10~15일 정도의 일거리만 있다. 같은 기간 일당은 7만원에서 9만원으로 올랐지만 일거리가 줄며 월수입은 175만원에서 90만원으로 반토막 났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최저임금 수준의 저임금 일자리는 그동안 노인들이 경쟁을 거치지 않고 손쉽게 구할 수 있어 생계의 안전판 역할을 했다”며 “하지만 이런 민간 일자리들이 급감하고 정부가 더 낮은 임금의 일자리를 직접 공급하면서 이들이 빈곤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말했다.
노경목/서민준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