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가 ‘초법적 경영간섭’ 논란에 휩싸인 ‘경영참여 목적 주주권 행사 가이드라인’을 재논의하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헌법상 ‘무죄추정의 원칙’에 위배되는 ‘이사 해임 주주제안’ 등 10여 개의 가이드라인이 상위법과 충돌한다는 비판의 목소리를 수용한 것이다.
‘합리적 배당정책’ ‘주주가치 훼손’ 같은 추상적 용어로 경영 개입을 정당화하려던 시도가 무산된 것이 무척 다행스럽다. 당초 보건복지부는 ‘경영참여 목적 가이드라인’을 ‘적극적 주주활동 가이드라인’으로 지침 명칭을 바꾸는 꼼수까지 동원하며 강행 의지를 비쳤다. 하지만 경영계는 물론 정부 내에서도 ‘깜깜이 지침’이라는 우려가 나오자 “추가 의견수렴에 나서겠다”며 일보 후퇴를 결정했다.
‘연금 사회주의 본격화’라는 비판이 컸던 국민연금 폭주에 일단 제동이 걸렸지만 안심하기는 이르다. 제대로 된 국회 논의도 없이 내부 지침을 밀어붙인 박능후 복지부 장관 겸 기금운용위원장이 “가이드라인을 더 구체화하겠다”고 언급한 만큼 추가 개입 시도가 예상된다. 현안인 연금 개편은 경제사회노동위원회와 국회로 떠넘겨 ‘골든 타임’을 2년이나 허송한 정부가 연금 사회주의로의 탈선에만 속도를 내는 기막힌 형국이다.
저수익, 저출산·고령화로 기금 고갈 예정 시점이 급속히 빨라지는 상황에서 자산 운용수익 극대화 노력도 한가하기만 하다. 수익률 제고의 선행 조건인 정부·정치로부터 독립 요구에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적립금이 714조3000억원(9월 말 기준)으로, 세계 3위 연기금이다. 하지만 정부의 기금 운용 관여도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는 지적이 나올 만큼 운영은 후진적이다. 기금운용위원장을 복지부 장관이 맡고, 기획재정부·농림축산식품부 차관 등 5명의 정부위원이 당연직으로 운용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다. 정부가 기금 조성에 기여하지 않으면서, 운용에 직접 참여하고, 의결권을 직접 행사하는 유일한 사례로 손꼽힌다.
더구나 국민연금 이사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캠프에서 활동한 전직 국회의원 출신이다. 연금의 정치화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전 세계적으로도 도입한 지 10년이 채 안 돼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스튜어드십 코드’라는 어설픈 칼로 기업을 쥐락펴락하겠다는 건 시장경제 시스템에 대한 위협일 뿐이다. 백번 양보해 불가피한 개입이라면 공정거래법 등 정해진 법령을 따르고, 필요하다면 법령을 개정하는 게 상식적이다. 국민연금이 내부 가이드라인으로 ‘경제 흑기사’ 흉내를 낸다면 심각한 월권이다.
‘나쁜 기업’을 골라내 최소한으로 개입한다는 게 복지부 설명이지만 정부 입맛 따라 휘둘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노후 자금을 맡긴 국민들에게 돌아간다. 스웨덴처럼 연금의 거대한 몸집을 몇 개로 분할해 효율을 높이고, 캐나다처럼 독립 운영을 엄격히 보장하는 지배구조 개편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국민연금을 정치에서 분리해 ‘국민 노후 지킴이’의 자리로 되돌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