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소위를 열 필요가 있나 싶네요. 자괴감이 듭니다.”
염동열 자유한국당 의원은 지난달 27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예산안등조정소위원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예결소위가 지난달 12일부터 이날까지 열 차례 정부 예산안을 심사하는 동안 심사 대상 사업 총 772건 중 482건을 보류한 것을 두고 한 발언이었다.
내년도 국회 예산심사가 2014년 국회선진화법 시행 이후 ‘최악 졸속’으로 치닫는 모양새다. 선거법 개정안 등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법안을 둘러싼 여야 정쟁으로 상임위원회 예비심사와 예결위 심사가 비정상적으로 이뤄진 데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선심성 증액이 줄을 잇고 있기 때문이다. 역대 최대인 내년도 513조5000억원 규모 예산안이 ‘누더기’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3개 상임위, 아직도 예산안 안 넘겨
1일 국회에 따르면 17개 상임위 중 보건복지위 운영위 정보위 등 세 곳이 이날까지도 예산안을 예결위에 넘기지 않았다. 청와대, 국회 등을 소관하는 운영위와 국가정보원 등을 소관하는 정보위는 아예 예산소위를 한 번도 열지 않았다. 내년도 83조원 규모 예산안을 다루는 보건복지위는 여야 간사가 심사 권한을 위임받아 협의 중이지만 사실상 상임위 차원의 심사가 무산됐다는 분석이다.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와 여성가족위는 삭감 규모를 두고 여야가 대립하면서 예산안을 의결하지 못한 채 정부 원안 그대로 예결위에 넘겼다. 예결위 관계자는 “여가위가 3시간30분 한 차례 회의한 뒤 상임위 차원의 예산 심사를 포기했다”고 설명했다.
예산안을 의결한 12개 상임위는 ‘칼질’보다 증액에 바빴다. 기획재정위(-452억원)를 제외한 나머지 11개 상임위가 모두 증액해 예결위에 넘겼다.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 3조4374억원, 국토교통위 2조3192억원, 교육위 1조2732억원 등 총 9조3910억원 규모였다. 사회간접자본(SOC)과 지방자치단체 현금 지원성 예산의 증액이 두드러졌다. 대부분 상임위 지역구 의원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예산이다.
국토위는 심사 과정에서 안성~구리 고속도로 사업 관련 예산으로 3062억5700만원, 이천~오산 구간의 도로 공사엔 1765억원을 증액했다. 증액에는 여야가 따로 없었다. 행정안전위는 한국당 의원들의 요구로 ‘이장·통장 수당 지원’ 사업에 1320억원을 새롭게 반영했다. 이장·통장에게 지급되는 기본수당을 월 최대 30만원에서 40만원으로 인상하기 위해서다.
‘깜깜이 소소위’ 또 가동
예결위는 상임위에서 대폭 증액돼 넘어온 예산을 심사하느라 진땀을 뺐다. 그나마 여야 간 정쟁으로 지난달 22일부터 엿새간 공전했다. 이 때문에 예결소위는 증액사업으로 넘어온 651건 중 169건(약 6300억 원)만 감액하고 나머지는 줄줄이 보류했다.
예결위는 결국 활동 종료 기한을 이틀 앞둔 지난달 28일 3당(더불어민주당, 한국당, 바른미래당) 간사협의체, 일명 ‘소(小)소위원회’를 가동시켰다. 소소위는 법적 근거가 없어 속기록도 작성되지 않는다. 김재원 예결위원장은 ‘깜깜이 심사’를 막기 위해 소소위에서의 속기록 작성을 제안했으나 민주당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그나마 여야 정쟁 때문에 소소위 심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 한국당 빼고 처리 강행?
국회법에 따라 2일부터 예산안 및 부수 법률안에 대해서는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신청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역대 최대인 513조5000억원 규모 예산안의 기조와 각 항목을 놓고 여야 간 의견차가 뚜렷해 예산안 심사는 앞으로도 진통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특히 증액 심사는 내년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각 지역 숙원사업 예산 등을 놓고 더욱 첨예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다. 한 소소위 참석자는 “간사협의체에서 합의율이 다소 올라갔지만 재보류 안건 역시 적지 않게 나오고 있다”며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고 말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민주당이 한국당을 배제한 채 나머지 야당과 협의해 예산안을 처리할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민주당 정춘숙 원내대변인은 전날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한국당을 빼고 본회의를 소집해 패스트트랙 법안과 예산안을 의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되면 정국은 최악으로 얼어붙을 전망이다.
임도원/고은이 기자 van769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