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수도 ‘블라인드 채용’으로 선발한다고 한다. KAIST와 같은 최고 대학에도 출신 학교는 물론 지도교수 등 개인 신상에 관한 정보를 가리고 교수를 뽑는 정부 지침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지원자의 모든 자료를 상세히 평가해도 석학을 선별하기 어려울 텐데, ‘공정한 선발’을 위해 블라인드 채용을 하라는 것이다. ‘30-50클럽’(1인당 소득 3만달러 이상, 인구 5000만 명 이상의 조건을 만족하는 국가)을 자처하고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겠다는 경제 대국에서 인공지능(AI) 전공 교수까지 ‘깜깜이’로 선발하자는 비문명적 발상이 어떻게 나온단 말인가. 국정 목표인 공정과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대학의 궁극적 가치인 학문적 수월성도 간과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실제로 공정사회 구현 정책은 사회 많은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학 입시까지 공정성을 명분으로 조령모개(朝令暮改)하며 정시를 확대하고 있고, 경제 정책에서도 공평한 사회를 만들자는 정책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하고 비정규직을 줄이는 소득주도성장도 이런 틀에서 추진되고 있으며, 복지와 의료 부문에서도 분배와 형평 등 진보적 가치가 정책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물론 이런 가치들은 어떤 경제체제에서도 마땅히 추구해야 할 중요 목표 중 하나다. 공정성이나 형평이 지나치게 왜곡된 사회에서는 결코 안정적 발전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공평한 사회의 구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경제개발 초기 단계에서 과다한 부(富)의 편중을 경험한 한국 사회에서는 공평의 추구가 다른 어떤 가치보다도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공정과 형평을 강조하는 정책은 자칫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우선 목표치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에 주관적인 편견과 도그마에 빠져 극단적인 정책 수단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작은 불공평도 구조적으로 개선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더 큰 본질적 가치를 훼손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깜깜이로 교수를 채용하는 경우도 공정성보다는 오히려 석학을 선별하지 못할 위험만 커지지 않겠는가.
교육 기회의 형평을 내세웠던 평준화 정책이 전형적인 사례다. 결과적으로 교육은 하향 평준화되고 신분 이동의 사다리마저 사라졌다. 누구나 부담 없이 다닐 수 있었던 지방 명문 학교들이 없어져 지금은 소외계층이 교육을 통해 ‘용’으로 거듭날 수 있는 ‘개천’마저 메말라 버렸기 때문이다. 교육 기회의 공평을 내세운 정책이 오히려 빈곤의 세습을 고착시키는 더 큰 부작용을 불러온 셈이다. 형평성을 이유로 최저임금을 모든 산업에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정책도 결국은 자영업과 같은 취약 산업에 더 큰 타격을 주고 있다. 다양한 특성을 가진 사안에 획일적인 형평을 밀어붙이면 기대했던 성과보다 본말이 전도되는 부작용이 나타나기 쉽다.
민간 대신 정부가 재정적자를 감수하며 소외계층의 분배를 개선하는 정책도 마찬가지다. 단기에는 이전소득의 증가로 형평이 개선된다 할지라도 후세에 부채를 전가해 결국은 세대 간 불공평한 부담만 가중시키게 된다. 재정지출을 확대해 정부가 비대해질수록 이런 위험은 더욱 증가한다.
실제로 경제에서는 공평의 가치 못지않게 반드시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가 따로 있다. 그것이 바로 자율성과 효율성이다. 공정성의 도그마에 빠져 경직된 규제만 강화하면 결코 경쟁을 통한 효율성의 제고를 기대할 수 없다. 기업 규모와 지배구조는 물론 노동과 환경, 정보 등 많은 부문에서 공정과 형평을 지상 목표로 삼는 획일적 규제가 적용된다면, 새로운 혁신산업은커녕 어떻게 경제를 활성화하는 생태계가 조성될 수 있겠는가. 따라서 공평의 가치가 경제구조 안에서 지속적으로 구현되는 자생적인 시스템을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민간의 자율성과 효율성이 뒷받침돼야 한다.
정부는 지속성장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불공정한 제도를 적극적으로 개선하고 고용과 생산은 민간 부문의 활성화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 자칫 포퓰리즘과 결합된 공정성의 도그마에 빠져 경제가 지향해야 할 궁극적 가치마저 흔들린다면 교각살우(矯角殺牛)의 황당한 사태를 불러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