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지핀 전기요금 인상···"1% 올려도 年5000억 국민 부담" [조재길의 경제산책]

입력 2019-11-28 10:01
수정 2020-02-26 00:01

칠레는 정치적으로 몹시 불안한 중남미 국가들 중에서 꽤 오랫동안 ‘우등생’으로 꼽혀왔습니다. 우리나라가 2004년 최초로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배경입니다. 중남미 국가 중 가장 부유했던 이 나라가 위기에 몰려 있습니다. 전기 지하철 등 공공부문 요금을 잇따라 올린 게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기 때문이죠. 전국에 비상사태가 선포됐습니다.

이번 시위에 따른 칠레의 경제적 손실은 지금까지 30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내년 정부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도 종전 대비 1%포인트(3~3.5%→2~2.5%) 낮췄습니다.

공공요금 인상은 이처럼 예민한 이슈입니다. 대상을 가리지 않고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죠. 민생 물가를 자극하는 주요 요인이기도 합니다. 탈원전을 국정 목표 중 하나로 내세웠던 우리 정부가 수 차례에 걸쳐 “전기요금 인상은 없다”고 공언한 것도 이런 파괴력을 감안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부 태도에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한국전력공사 한국수력원자력 등 전력·발전 공기업들의 대규모 손실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한전은 작년에 6년만의 손실(-2080억원)을 기록한 데 이어 올해는 더 큰 적자를 예상하고 있지요. 부채도 빠르게 늘어 현재 123조원에 달합니다.

최근 “전기요금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군불을 땠던 한전에 대해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는 “전기요금 조정 권한은 정부가 갖고 있다. 지금 시점에서 요금 인상 논의는 적절하지 않다.”고 선을 그었지요. 뉘앙스가 달라진 건 엊그제 배포한 보도설명자료에서였습니다. ‘전기요금 조정 필요성과 세부 방안을 검토할 것’이란 내용이 골자였지요.

조명래 환경부 장관이 “정부는 발전분야의 미세먼지 배출 저감을 위해 석탄발전 가동 중단과 상한 제약을 철저히 이행할 계획이다. (내년은) 미세먼지 계절관리제 첫 해로, 전기료 인상이 없을 것이다.”고 밝히자 산업부가 즉각 반박하며 내놓은 자료입니다. 정부 내 이견이 바로 돌출된 것도 흔치 않지만 그 내용은 더 흥미롭습니다. 산업부는 “현재로선 전기요금 인상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히 예단할 수 없으나 석탄발전 감축 때 비용이 수반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내년 상반기 중 실제로 소요된 비용을 정확히 산정한 뒤 전기요금 조정 필요성과 세부 조정방안을 검토하겠다.”고 했습니다.

즉 “내년 전기요금 인상이 없을 것이란 환경부 발표는 잘못 됐으며, 상반기 중 면밀하게 검토해 요금을 조정하겠다”는 입장으로 읽힙니다. 요금 인상에 대한 표현 수위가 종전보다 과감해 졌습니다. 다만 실제 논의 시점은 내년 4월 총선 이후가 될 것이란 공감대가 정부 내에 형성돼 있지요. 한전이 오늘 오후로 예정된 이사회에서 “전기요금 개편안을 안건에 포함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으나 논란 확산을 의식한 조치일 뿐 요금 인상 방침을 거둬들인 건 전혀 아닙니다.

그렇다면 전기요금을 1% 올리면 한전엔 얼마나 수익 개선 효과를 줄 수 있을까요.

한전이 최근 공시한 자료를 보면, 전기요금을 1%만 올려도 4300억원의 ‘법인세 비용 차감 전 순익’을 낼 수 있습니다. 작년엔 이 효과가 5800억원에 달했지요. 매년 차이가 나긴 하지만 대략적으로 ‘전기요금 1% 인상→한전 세전이익 5000억원 개선’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한전이 내년에 전기요금을 5%만 올려도 연간 2조5000억원의 수익 개선을 꾀할 수 있습니다. 작년과 올해 적자를 한꺼번에 털어낼 수 있는 규모이죠. 역으로 말하면, 국민들이 연 2조5000억원을 더 부담해야 한다는 겁니다.

전기요금을 인상하면, 일반 서민과 자영업자가 가장 큰 타격을 입을 수 있습니다.

조재길 기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