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정을 하거나 예정을 하지 않는다. 그저 지나치다 마주하는 것과 마음을 담아 영감을 나눈다. 순간마다 색다른 현상으로 다가오는 것에 몰입하고, 그 찰나 일상적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색칠한다. 대상에의 몰입, 바로 순간이 그림이 됐다. 지난 20여 년간 일상의 풍경을 사진처럼 재현해온 서양화가 이만나 씨(48)의 이야기다.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이달 30일까지 열리는 이씨의 개인전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풍경에서의 색다른 경험과 내면의 심리를 추적한 미학적 과정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자리다. 그는 ‘먼 봄(The Distant Spring)’을 주제로 한 전시에 오랜 시간을 거쳐 그려낸 그림 14점과 드로잉 9점을 펼쳐놨다.
26일 전시장에서 만난 이씨는 “우리가 경험하는 봄은 마음속 고향의 봄 같은 풍경과 다를 수 있다”며 “가까이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멀리 있는 봄의 감각을 오랜 시간 숙성해 그렸다”고 설명했다. 서울대 미대와 독일 브라운슈바익 조형예술대를 졸업한 작가는 여러 번의 붓질과 아크릴 물감 뿌리기, 흘리기 등을 통한 기법으로 나뭇잎과 꽃잎 하나하나가 흔들리는 듯한 풍경을 그려냈다.
전시장에 들어서니 겨울 문턱에서 낯선 봄이 바람에 스치듯 눈인사를 보낸다. 작가가 느낀 봄 풍경을 2년 동안 공들여 파고든 신작이다. 푸른 싹이 돋아나고 진달래와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었지만, 그가 그린 봄은 따뜻하고 화사하지만은 않다. 화창한 봄날이 아니라 안개 낀 듯 공기는 뿌옇고 부슬비가 내리기도 한다. 아름다운 자연만이 아니라 건물과 다리, 아파트 같은 구조물도 등장한다.
‘봄 성’은 부슬비에 젖어가는 풍경을 표현하고자 장지(壯紙)에 작업해 더 많은 시간과 씨름했다고 작가는 설명했다. “봄의 율동을 그대로 담아내기 위해서”라고 했다. “예술작품은 하나의 감각 존재이며 다른 그 무엇도 아니다”고 했던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말이 떠오르는 작품이다.
작가는 “기본적으로 실제로 존재하는 풍경을 그리지만, 대상이 일상적이지 않게 다가왔을 때 그려야겠다고 마음먹는다”며 “스치는 대상이 마음에 파동을 불렀을 때 붓을 드는 그 순간이 제겐 그림”이라고 말했다. “혹독하게 추운 겨울에 간절하게 봄을 기다리지만, 막상 돌아온 봄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는 작가의 이야기가 왠지 구슬프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