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아시아나항공 본입찰을 앞두고 시장은 HDC현대산업개발의 입찰가를 2조원 안팎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HDC현산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2조5000억원을 써냈다. 본입찰 직전 정몽규 HDC그룹 회장이 직접 입찰가를 높일 것을 지시했다는 후문이다. 그는 실무진에 “모빌리티그룹을 지향하기 위해선 아시아나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확고한 의지를 드러냈다. 그가 아시아나항공 인수에 강한 의지를 나타낸 이유는 무엇일까.
대를 이은 정세영 명예회장의 유지
아시아나항공 인수 이전에도 정몽규 회장은 신사업에 대한 갈증이 컸다. 정 회장은 오랜 기간 신사업 진출에 대한 의지를 지속적으로 드러냈다. 지난 1월 HDC 임원들이 모인 ‘2019 경영전략 회의’에서 “그룹 간 사업을 융합해 새로운 고객경험을 제공함으로써 반걸음 앞서 나가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HDC현산의 공격적인 움직임은 이전부터 시작됐다. 2015년 호텔신라와 손을 잡고 합작법인 HDC신라면세점을 설립했다. 지난해엔 국내 최대 부동산 정보업체인 부동산114를 인수했고 올 4월에는 한솔오크밸리의 경영권을 인수했다. 아시아나항공 인수는 이런 흐름의 정점을 찍는 행보라고 볼 수 있다.
일각에서는 신사업에 대한 정몽규 회장의 갈증의 뿌리를 부친에게서 찾기도 한다. 정세영 HDC현산 명예회장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루려는 의지가 작용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다. 정 명예회장은 1967년 현대자동차의 초대 사장으로 취임해 30년 넘게 경영을 도맡아왔다. 하지만 현대그룹이 분리되는 과정에서 현대차 경영권이 정몽구 회장에게 넘어갔고, 정세영 회장은 현대산업개발을 받게 됐다. 범(汎)현대가의 한 관계자는 “현산의 임원들 사이에서는 정세영 명예회장의 옛 포부를 이어받아 건설업에만 머물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다”며 “그것이 이번에 항공업 인수에 뛰어들게 된 배경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HDC 현산 관계자는 "10대 건설사 중 남다르게 압구정 현대아파트, 수원 아이파크시티 등의 개발사업과 서울 춘천 고속도로, 부산신항 등의 민자 SOC 사업을 펼쳐왔듯이 건설업을 넘어 초연결시대에 선대응하기 위한 의미에서 연구해보자는 회장님의 의지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몽규 회장도 지난 12일 HDC현산이 아시아나항공 인수 우선협상자로 선정된 직후 기자회견에서 “HDC가 모빌리티그룹으로 한 걸음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향후 항공을 비롯해 육상과 해상 쪽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모빌리티그룹’이란 표현에서 드러나듯 과거 현대차에 대한 짙은 향수와 DNA를 과시하는 동시에 더 큰 포부를 드러낸 일성(一聲)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범현대가의 든든한 지원
HDC현산이 과도한 인수가를 제시한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하게 되면 9조6000억원이 넘는 부채를 떠안아야 한다. 항공기 노후화 등에 따른 추가비용, 인수과정에서 드러난 우발채무, 항공업황 악화 등도 문제다. 본입찰이 마감된 다음날인 지난 8일 HDC현산 주가는 전일 종가 대비 7.3% 떨어진 3만1050원에 장을 마쳤다.
하지만 정몽규 회장에게는 ‘범현대가’라는 든든한 지원군이 버티고 있어 시장의 우려를 불식시킬 것이라는 평가도 만만치 않다. 실제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몽(夢)’자 돌림 모임 구성원들이 정몽규 회장의 아시아나 인수전 지원을 위해 의향서(LOI)를 써준 것으로 알려졌다. 향후 아시아나항공 사업에 각종 지원과 이용 등을 담보해주는 성격의 LOI로 전해진다. 가령 현대오일뱅크에서 항공유를 저렴한 가격에 사온다거나 현대중공업, 현대모비스 등 여객과 물류가 필요한 기업이 아시아나를 이용하는 식의 지원이 가능하다. 모임 구성원들은 예비입찰 직전 아시아나항공의 인수 리스크 검토 등에 관련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범현대가 간 협력은 처음이 아니다. 2008~2009년 우리은행 등 채권단이 관리하고 있던 현대종합상사를 정몽혁 회장이 인수하도록 지원하기 위해 사촌지간인 정몽진 KCC 회장,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등이 나서 십시일반으로 자금을 대준 전례가 있다. 이를 바탕으로 정몽혁 회장은 현대종합상사를 되살릴 수 있었고, 2015년에는 현대중공업그룹에서 독립했다. 당시 현대중공업은 지분 19.4%를 현대코퍼레이션홀딩스(당시 현대C&F)에 팔았고, 정몽혁 회장이 현대코퍼레이션홀딩스의 지분 12.3%를 인수해 회사의 수직 계열구조를 갖췄다.
이 외에도 1조1773억원의 현금성 자산과 4542억원의 단기금융상품 등 1조6000억원 이상의 현금 동원 능력이 있는 HDC현산의 탄탄한 자체 자금력, 자기자본 9조원 규모의 FI(재무적 투자자) 파트너 미래에셋대우의 존재 등도 인수전에 과감하게 뛰어들 수 있던 요인이었다.
“위기가 기회다”
물론 우선협상과정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변수에 따라 정몽규 회장의 향후 행보가 달라질 수도 있다. 기존 실사과정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우발채무가 더 존재할 수 있고, 에어부산·아시아나IDT 등 아시아나항공의 자회사 처리 문제도 남아 있다. 현대가의 지원이 실제 어디까지 이뤄질지도 미지수다.
일부 전문가는 범현대가가 FI로 지원사격을 할 수 있다고까지 전망하지만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정 회장은 기자회견에서 아시아나항공 인수에 대한 언론의 의문에 “경제가 좋지 않은데 왜 인수를 추진하냐고 하지만, 경제가 어려울 때가 오히려 기회”라며 “위기일 때 오히려 상당히 좋은 기업을 인수할 수 있다”고 했다. 야심찬 승부수를 띄운 그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구민기 기자 koo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