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X조선해양과 대선조선이 또다시 유동성 위기에 몰렸다. 지역 정치권과 노조의 반발 탓에 근본적인 체질 개선 없이 미봉책만 거듭하면서 국내 중형 조선사의 위기가 반복되고 있다.
19일 채권단에 따르면 대선조선은 최근 주채권은행인 수출입은행에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대선조선은 선박 건조 후 인도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으면서 협력사 결제대금 지급을 미루고 있다.
STX조선도 조만간 산업은행에 자금 지원을 공식 요청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STX조선의 경남 창원 야드에선 연간 20척가량을 지을 수 있지만 올 들어 3분기까지 수주한 배는 4척에 불과하다. 산업은행은 STX조선의 유동성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이른 시일 내에 실사를 시작할 계획이다.
수주 가뭄 속 중형조선사
수출입은행 집계에 따르면 STX조선, 성동조선, 대한조선, 대선조선, 한진중공업 등 국내 중형조선사의 올 3분기 누적 수주량은 17척으로 전년 동기(18척)보다 더 줄었다. 2016년(120척)에 비해선 80% 이상 줄어든 수치다. 2007년 세계 중형선박 생산의 17.7%를 담당했던 한국의 점유율은 지난 3분기엔 3.4%로 떨어졌다.
조선사 통폐합 등 큰 그림 없이 비핵심자산 매각과 감원 등 미봉책만 반복하며 시간을 보낸 사이 중형조선소에서 수백 곳 기자재 업체로 이어지는 산업 생태계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세계 1위 조선사인 현대중공업이 2위인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하는 등 자발적 구조조정에 나선 대형 조선업계와는 다른 양상이다.
지난여름까지 구조조정업계에선 중형조선사 통폐합설이 심심치 않게 거론됐다.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이 주채권은행을 맡고 있는 5개 중형조선사를 중심으로 통합 중형조선사 설립을 정부가 추진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소문만 무성할 뿐 실행은 없었다. 정부는 조선업 활력 제고 방안을 내놨지만 영세업체를 지원하는 데 그쳤다. 한 투자은행 소속 구조조정 전문가는 “중형조선사에는 일단 ‘각자도생’하라는 것 외에 아무런 정부 정책이 없다”며 “그 사이 중형조선사들은 조용한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고 말했다.
급한 불만 끄자는 미봉책
정치적 부담이 작은 미봉책으로 덮어둔 문제들도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아닌, 비핵심자산 매각과 무급휴직 등으로 일시적으로 자금을 확보하거나 비용을 줄이는 방식의 구조조정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평가다.
성동조선해양은 지난해 3월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에 들어가며 고용인원을 1200명에서 400명으로 줄이려 했지만 800명에서 구조조정을 멈췄다. 노조를 비롯해 지역 정치인들이 인력 구조조정에 반대해서다. STX조선 노조는 무급휴직에 들어간 생산인력(500명) 중 절반의 복직을 요구하며 연일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진중공업과 대선조선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좁은 부산 영도조선소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산기지를 구축해야 한다는 지적이 10년 내내 이어졌지만 특혜 시비를 우려해 논의가 전혀 진전되지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한진중공업은 필리핀 수빅에, 대선조선은 부산 다대포에 생산기지를 마련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수빅조선소가 올초 필리핀 현지에서 법정관리를 신청한 뒤 특수선 전문사로 쪼그라든 한진중공업은 연말께 매각이 추진될 예정이다. 대선조선의 다대포 공장은 규제 문제가 풀리지 않아 블록 공장으로만 쓰이고 있다.
철학 없는 정책이 낳은 인재(人災)
정부는 팔짱만 낀 채 이런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중형조선을 살릴지 죽일지, 살린다면 어떤 방식으로 몇 개사를 살릴 것인지, 일부만 살린다면 남은 인력과 기술을 어떻게 보전할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구조조정 실무를 맡은 국책은행들은 정부 지침 없이 섣불리 움직일 수 없다는 보신주의에 빠져 있다. 한때 활발하게 논의되던 통합론은 아예 자취를 감췄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감원 등을 결정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다.
신종계 서울대 조선공학과 교수는 “지금은 몇 개 남지 않은 중형조선사가 수주를 해와도 배를 짓기 위한 선수금환급보증(RG)을 끊어주는 것을 은행들이 꺼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올 연말까지 이들의 생존 전략을 세우지 않으면 한국은 장기적으로 중형조선사 없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황정환/이상은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