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등을 이용한 ‘리걸테크’가 법률서비스 시장에 빠르게 파고들면서 10~20년 뒤에는 로펌 생존을 위협할 정도가 될 겁니다.”
강석훈 법무법인 율촌 대표변호사(사법연수원 19기)는 17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리걸테크 역량을 키워 변호사들이 잡무에서 벗어나 고부가가치 업무에 매진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이같이 말했다. 리걸테크는 법률(legal)과 기술(technology)의 합성어로 AI와 빅데이터 등의 정보기술(IT)을 활용한 법률서비스다.
굴지의 대형 로펌인 율촌은 리걸테크 시대에 어느 곳보다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강조한다. 지금까지 세금과 준법감시 등 분야에서 네 개 이상의 앱(응용프로그램)을 개발해 현업에서 활용하고 있다. 지난해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로부터 ‘가장 혁신적인 아시아로펌상’을 받았다.
150개국 조약 분석해 해법 제시
‘조세의 율촌’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세금 분야에서 전문성을 자랑하는 율촌은 올해 조세와 관련해서만 두 개의 앱을 개발했다. 해외 왕래가 잦은 기업인과 투자자들이 거주자(거주자성)로 분류되는지 여부를 따져주는 앱과 세계 각국의 조세조약을 모두 검토해 기업들이 해외 진출, 인수합병(M&A) 등을 시도할 때 최적의 투자 해법을 찾아주는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 개발은 2015년 출범한 ‘e율촌팀’이 담당했다. 임정준 전 골드만삭스 홍콩본부장(미국 스탠퍼드대 이론물리학 박사)이 고문을 맡고 허범·석지운 변호사와 유태양 연구위원 등이 주축으로 활동하는 팀이다. 프로그래머 출신 3명도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
투자자와 기업인들의 거주자성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율촌이 로펌업계 처음으로 내놓은 앱이다. 국내에 거주지가 있는지, 국적은 어딘지, 해외 출장은 얼마나 오래 다니는지 등에 따라 거주자 여부가 결정되고 세금이 달라진다. 세금 탈루 여부도 거주자성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율촌의 프로그램은 수백여 개 판례를 빠르게 검토해 거주자성 판단에 도움을 주고 해법까지 제시해 준다.
조세조약 자문 앱은 글로벌 기업 인수 등 해외 투자에 핵심 변수가 되고 있는 국제 조세조약과 관련해 법률 자문을 해 준다. 국가와 투자 규모·형태 등을 입력하면 미국이나 아세안 국가 등 조세 혜택이 큰 곳 중에서 어디에 특수목적법인(SPC)을 세우고 어떻게 거래(딜) 구조를 짜는 게 절세 차원에서 유리한지 알아볼 수 있다. 허범 율촌 변호사는 “150여 개국의 조세조약과 주요국 세법을 모두 망라한 프로그램”이라고 설명했다. 율촌의 조세 관련 앱은 컴퓨터 언어를 배운 변호사들이 코딩한 ‘챗봇’으로, 이용자가 채팅하듯이 정보를 입력하고 확인하는 대화형 프로그램이다.
강 대표변호사는 “세계적으로도 AI 기술이 접목된 세무 자문 앱은 드물어 외국에서도 벤치마킹하러 찾아올 정도”라며 “리걸테크를 활용해 조세 자문 고객 저변을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로 넓혀 가고 싶다”고 말했다. e율촌팀은 리걸테크 연구를 선도하는 스탠퍼드대 로스쿨 초청을 받아 21일 ‘AI 택스(인공지능을 활용한 세무 자문)’를 주제로 강연할 예정이다.
제약 리베이트 앱은 외국 회사에 판매
율촌은 국제 건설 분쟁에서 수십 년의 송무 경험을 갖춘 영국계 로펌 한 곳과 함께 건설 컴플라이언스(준법감시) 자문 앱도 개발 중이다. AI 기술을 활용해 국제 건설분쟁에서 계약 위반 리스크를 사전에 진단하고 대책을 세워주는 프로그램으로, 국내 로펌업계 최초 시도다. 건설 컴플라이언스 앱은 영국법과 한국법으로 진행된 건설분쟁 판례 수천 건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허 변호사는 “대부분 국제 건설 분쟁의 준거법이 영국법이어서 다국적 건설사뿐만 아니라 해외에 진출한 국내 건설사에도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준법감시와 관련해 율촌은 제약 컴플라이언스 앱도 보유하고 있다. 임정준 고문은 “이 앱은 제약사 영업담당자가 의사나 공무원을 만날 때 지켜야 하는 각종 리베이트 관련 규정을 어떻게 준수할 수 있는지 알려준다”고 말했다. 현재 국내에 있는 한 다국적 제약사가 율촌으로부터 이 앱을 구매해 활용하고 있다. 율촌은 제약 컴플라이언스 앱을 통해 FT로부터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강 대표변호사는 “리걸테크는 해외에서도 수익 모델이 정착되지 않았지만 발전 가능성이 크다”며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법률서비스 혁신에 가속도가 붙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안대규 기자 powerzanic@hankyung.com